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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 등번호/HERO! 이야기/손흥민 잘하는지/프로필 -총 정리

by 생생생존정보 2022.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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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

울산 현대 감독
이름
홍명보
洪明甫|Hong Myung-bo
출생
1969년 2월 12일 (53세)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국적
 
대한민국
 
신체
181cm|74kg|B형
직업
축구선수 (센터백 / 은퇴)
축구감독
축구행정가
등번호
20
소속
선수
상무 축구단 (1991 / 군 복무)
포항 제철 아톰즈 (1992~1997)
벨마레 히라츠카 (1997~1998)
가시와 레이솔 (1999~2001)
포항 스틸러스 (2002)
LA 갤럭시 (2003~2004)
감독
대한민국 U-20 대표팀 (2009)
대한민국 U-23 대표팀 (2009~2012)
대한민국 대표팀 (2013~2014)
항저우 뤼청 (2015~2017)
울산 현대 (2021~ )
코치
대한민국 대표팀 (2005~2007)
대한민국 U-23 대표팀 (2007~2008)
안지 마하치칼라 (2013)
행정가
대한축구협회 (2017~2020 / 전무이사)
국가대표
136경기 10골 (대한민국 / 1990~2002)
학력
서울광장초등학교 (졸업)
광희중학교 (졸업)
동북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 학사)
종교
무종교
가족
본인 1남 2녀 중 첫째
가족 배우자 조수미, 장남 홍성민, 차남 홍경민
학력
서울광장초등학교 (졸업)
광희중학교 (졸업)
동북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 학사)
종교
무종교
가족
본인 1남 2녀 중 첫째
가족 배우자 조수미, 장남 홍성민, 차남 홍경민

 

1. 소개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이자 축구행정가.
1990년대 한국 축구, 나아가 아시아 축구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수비수였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최다출장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90년대 당시 아시아의 모든 축구 선수 중에서 세계적 레벨에 가장 근접한 선수라는 평을 받기도 했으며, 실제로 90년대 해외 언론에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선수를 꼽을 때 단골로 꼽히곤 했다.
황선홍과 함께 90년대 대한민국 대표팀을 이끄는 쌍두마차였으며, 1990년부터 2002년까지 월드컵에 4회 연속 출장, 황혼기에 2002 한일월드컵에 출장하여 대표팀의 주장이자 맏형으로 4강 신화를 이루는데 크게 공헌했다.
지도자로서는 아직 커리어를 쌓아나가는 중이며 평가가 엇갈리는 부분이 있지만, 선수로서는 대한민국 축구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레전드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지도자로서는 2012년 대한민국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맡아 런던 올림픽 동메달 신화를 쓰며 지도력을 입증했으나, 2013년부터 2014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참가한 브라질 월드컵에 각종 논란 속에 아쉬운 성적을 거두었고, 연이은 항저우 뤼청에서도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를 맡는 등 축구행정가로 일하기도 했으나, 2021년부터 울산 현대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다시 한 번 지도자로서 도전하게 되었다.
.

 

2. 상세

 

14년간 대표팀 주전으로 활약하며 황선홍과 함께 H-H라인이라 불릴 정도로 1990년대 한국 축구를 이끌었다.
국가대표팀에서 A매치 136경기를 출전해 우리나라의 역대 최다 출장자이며, 그 과정에서 대표팀의 성적에 많은 공헌을 했다.
1994 미국 월드컵에서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팀 공격의 핵심 역할을 했고, 유럽 강호들을 상대로 뛰어난 활약을 보여 이 때부터 유럽 클럽들도 여러 이적설을 띄우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96년에는 우리나라 선수 최초로 FIFA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 득표하여 21위에 올랐다.
그의 명성이 정점에 다다른 대회는 2002 한일 월드컵이었고 한국 팀을 4위에 올려놓은 성과를 인정받아 아시아 선수 최초이자 유일한 월드컵 브론즈볼과 월드컵 올스타 팀, FIFA 올해의 선수 17위, FIFA 100 등 엄청난 커리어를 쌓았다.
선수/지도자로서 합법적 병역 브로커를 모두 달성한 케이스.
다만 홍명보는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상무에서 병역 생활을 했었고 그나마 4대 독자여서 6개월만 복무했다.
그러나 감독으로서는 극과 극을 경험했다.
2009 U-20 월드컵 8강,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3위)을 차지하는 등 초반에는 연령별 대표팀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따라 많은 국민들에게서 극찬을 들었으나, 성인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으면서 기존에 스스로 세운 원칙을 깨뜨리고 자신이 올림픽에서 썼던 '런던 세대' 위주로 선수를 선발하여 '으리 축구' 논란을 일으켰고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1무 2패라는 성적과 더불어 최악의 경기력까지 보이면서 국민들에게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최고의 순간(2012 런던 올림픽)과 최악의 흑역사(2014 브라질 월드컵)를 모두 지녔기에 극과 극을 경험했다.
2017년에도 중국 리그의 항저우 그린타운에서 감독을 맡다가 쫓겨나 예전과는 다르게 감독으로서의 그를 기대하는 팬들은 사라졌다.
이후 2021년에 울산 현대의 감독을 맡으면서 명예회복과 재기를 노리고 있다.
행정가로서는 호평을 받았다.
대한축구협회에서 전무이사로 활동했는데, 초반에는 A대표팀 감독 시절의 비판, 낙하산 인사 문제, 당시 축구협회의 논란에 의해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부회장 겸 기술위원장에 김판곤 전 홍콩 감독을 초빙하여 축구협회의 미숙한 행정 처리를 상당히 개선시켰다.
대체로 감독 시절보단 행정가로서 더 유능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실제 재능도 이쪽이 더 높아 보인다.
원래 본인의 꿈은 지도자가 아닌 행정가였는데, 처음부터 협회에서 앉혀준 국가대표 코치 말고 행정가로서의 말단부터 차근차근 올라갔다면 지금보단 평가가 백배 나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브라질 월드컵에서의 실패 때문에 긍정적인 면도 저평가받고 있다.

 

2.1. 행정가 경력

 

2017년 축구협회의 파동에 따른 조직 개편에서 전무이사로 선임되었다.
분명 감독 시절의 실책이 크기는 하지만 선수 시절의 훌륭한 경력과 올림픽 대표팀에서의 성과 등 실적이 없는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거기다 홍명보/지도자 경력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홍명보 본인은 이전부터 지도자보다 행정가 쪽으로 꿈꾸고 있었다.
본인의 자서전에도 행정가가 되는 것을 더 희망하기도 했으니 어떻게 보면 궁극적으론 본인이 원하던 대로 행정가가 된 셈.
다시 감독직을 절대로 수행하지 않으리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일단 감독 생활의 끝이 썩 유쾌하지도 않았고 본인이 희망하는 진로로 다시 가닥을 잡았으니 감독은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본인 스스로도 지도자는 안 맞는다고 생각하고 행정가의 길을 갈 작정이라고 한다.
단, 홍명보의 행적에서 드러나듯 축구협회 파동의 근본적 원인으로 지목되는 정치라인을 탄 인사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축구팬들은 매우 부정적인 의견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박지성, 홍명보를 발탁한 협회의 깜짝인사가 애초에 근본적으로 스타 마케팅이자 2002년 추억보정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구조 개편으로 이미지 쇄신을 꾀했던 협회의 이미지는 좋아지기는 커녕 바닥을 모르고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애초에 전무이사라고 하면 고위 임원급 보직인데 홍명보는 행정가 준비를 하기는 하였으나 제대로 행정 실무를 수행한 적은 없으니 못 해도 전무급의 고위직은 아닌 위치에서 시작해야 정상이다.
사실상 낙하산이다.
애초에 행정가라는 어감 때문에 착각하기 쉬울 뿐 우리가 생각하는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공무원이 아니라 처음부터 은퇴 이후 한국 축구의 주요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고위직을 지망했다고 봐야 한다.
현장에서 뛰기 보다는 바로 고위직에 오르고 싶어했다는 이야기인데 뒤에 나오는 해설가들 비판 발언들을 보면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이후에 알려졌지만, 김판곤을 협회 부회장 겸 국가대표 감독선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김판곤 말로는 서로 간의 연이 전혀 없는데 도대체 왜 본인을 추천했는지 놀랐다고.
많이 아는대로 현재까지의 김판곤 영입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2018년 3월 22일 서울 중구 두타몰 특설무대에서 열린 2018년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컬렉션 런칭 이벤트 '이빨을 드러내라' 토크쇼에 참석했다.
바이에른 뮌헨과 MOU계약을 맺기도 하고, 도쿄 올림픽을 위해 김판곤과 같이 선수 차출을 위한 협상을 뛰는 등 행정가로서는 큰 실책이라 할 것 없이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후 2021년, 울산 현대의 감독직을 맡으면서 행정에는 잠시 손을 놓을 것으로 보인다.

 

3. 플레이 스타일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 이란전에서 공격적인 오버래핑 이후 이동국에게 공을 배급하는 모습.
1994 FIFA 월드컵 미국 스페인전에서 루이스 엔리케와 몸싸움을 벌여 공을 빼앗고 파울을 유도하는 모습.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네덜란드전에서 오베르마스의 공을 빠른 커팅으로 되찾아오는 모습.
"홍명보는 한국의 기형적인 시스템이 낳은 기형아이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저런 선수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1994 미국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 해설자한국에서 나오기 힘든 불세출의 재능이자, 유스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기 전인 1990년대 이전의 한국에서 나온 특이한 유형의 선수.
현재를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독특한 스타일의 선수였다.
고려대학교 재학시절엔 평범한 미드필더에 불과했지만, 남대식 감독이 재능을 간파하면서 수비수로 정착했다.
피지컬과 스피드, 대인 수비 능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뛰어난 축구 지능을 바탕으로 두 스토퍼들을 커버하며 볼을 차단하고, 중앙에서 수비 라인을 리딩하는 스위퍼로 활약했다.
그리고 미드필더 출신으로서 전술 이해도, 넓은 시야, 날카로운 양발 패스를 갖춰 후방에서 경기를 조율하며 빌드업 하다 어느새 중원까지 치고 올라와 위협적인 전진 패스를 찔러주는 등, 가히 탈아시아급이라 할 만한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이에 따라 클럽팀, 대표팀을 막론하고 3백의 중앙 스위퍼로서 중용되었으며, 강렬한 리더십으로 팀 동료들 사이에서 항상 신망이 두터웠다.
같은 포지션에 유사한 성향을 지닌 프란츠 베켄바워와 비견되기도 했다.
전성기의 홍명보는 스위퍼의 기준을 넘어 리베로에 가까운 경기조율, 패싱을 보여주었고 이를 가장 잘 보여준 대회가 1994년 미국 월드컵이었다.
이 대회에서 홍명보는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며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절정의 시기를 달렸다.
2002년에 들어서 점차 노쇠해진 홍명보는 리베로 보다는 기존의 스위퍼 플레이를 하며 대부분의 팬이 기억하는 스위퍼-리베로 사이의 애매한 플레이를 구사했다.
그럼에도 영원한 리베로라는 명성에 걸맞는 번뜩이는 빌드업과 수비로 2002년 월드컵 브론즈볼을 수상했다.
홍명보는 넓은 시야와 정확한 롱패스를 활용해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후방 빌드업을 전담했다.
중거리 슈팅도 제법이었지만, 정작 프로에서 미드필더로 뛸 때에는 피지컬과 볼 키핑 능력, 빠르게 패스를 주고받는 원투터치 플레이 등 미드필더에게 요구되는 기술들에 익숙치 않다는 점들이 여실히 드러나며 실패했다.
게다가 수비수로도 단점들이 명확했는데, 1:1 대인수비에는 오히려 수비형 미드필더들보다도 약한 모습을 보여줘서 다른 수비수가 와줄 때까지 시간을 끄는 수준이었으며, 제공권도 약해서 센터백이 둘뿐인 4백에서는 써먹기 힘들었다.
홍명보의 대인 수비 능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편인데, 미국 월드컵 독일전을 보면 홍명보는 시종일관 독일 선수들의 피지컬에 고전했으며 로타어 마테우스와 몸싸움을 할 때도 팔을 써서 마테우스를 잡아 끄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홍명보가 수비수로서 실격 수준의 피지컬과 몸싸움을 가졌다면 빌드업 능력 하나만으로 A매치에서 136경기를 뛸만큼 중용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홍명보는 상대와 거리를 두고 재는 것과 커버링에 능한 선수였지 피지컬을 써서 경합을 통해 볼을 탈환하거나 공격활로를 차단하는 능력까지 잘 갖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2002 때의 홍명보를 보면 1대 1 상황에서 과감한 태클로 공을 뺏어오는 경우가 의외로 꽤 자주 있었다고는 하지만 홍명보도 수비수는 수비수고 아무리 대인 수비 능력이 취약해도 최소한의 것들은 하니, 이것을 보고 홍명보의 스토퍼적 면모가 좋았다고 보긴 어렵다.
2002년 월드컵의 히딩크도 대인 수비 능력이 부족한 홍명보를 중용하기 위해 지역 수비 위주의 4백을 포기하고 3백을 선택해야 했다.
게다가 경합이 약한 홍명보를 보좌하기 위해 유상철, 김남일 등 몸싸움에 능한 미드필더를 필수적으로 써야 했다.
상술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했던 탁월한 예측력으로 패스 커트와 슛각도 좁히기, 블록 등에 능했으며 다른 스토퍼가 먼저 상대를 막다가(이하 이 행동을 챌린지로 통칭) 뚫리면 귀신같이 나타나 공격을 끊는 커버 능력 때문에 수비진의 전설로 남은 것이다.
그의 결정적인 선방 장면들은 수비적 기본기보다는 예측을 통한 위치선정 능력이 뛰어나서 그런 경우가 많다.
즉 1:1보다는 다대일이나 막 1:1을 뚫은 상대를 저지하는 능력이 좋으며 자신이 부릴 수 있는 동료가 있으면 능력을 발휘하는 커맨더형 수비수였다.
또한 홍명보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장점으로 양발을 모두 사용하는 선수였다는 것.
양발잡이 공격수보다 훨씬 드문 양발잡이 수비수로서 왼발, 오른발을 가리지 않고 태클이 가능해서 순간적인 커버링에 특화된 수비 능력을 보여주었다.
물론 태클 뿐만 아니라 패스와 슛 역시 양발로 가능했기에 수비 이후 빠른 공격 전환에도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홍명보는 3백에 특화되어있던 선수였다.
4백은 필연적으로 중앙수비가 직접적으로 상대 공격수와 맞대결하게 되기 때문에 홍명보를 4백의 센터백으로 1명의 파트너만 붙였다간 수비가 박살난다.
근데 그의 탁월한 커버 능력은 그의 부족한 챌린지 능력을 커버하고도 남을 정도로 괜찮았는데, 이는 당시 한국 축구의 특성 때문이다.
K리그로 대표되는 한국 수비수들은 전통적으로 강인한 피지컬과 집요한 투지를 바탕으로 전투적인 챌린지를 하는 파이터형 수비에 특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두 명만 모아서 쓰리백의 양쪽에 넣어 놓으면 그들의 챌린지 능력은 최소 2인분 이상~심지어 3인분에 달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대다수의 K리그 팀 센터백은 쓰리백을 추구하였다.
특히 2002년의 김태영 - 최진철은 이 분야에서 역대급으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그들의 중앙엔 이들의 챌린지가 뚫렸을 경우 뒤에서 커버를 쳐 줄 수 있는, 챌린지 능력은 별로지만 커버 몰빵형인 스위퍼가 있어도 그리 압박에 밀릴 걱정이 없었는데다가, 상술했듯 한국 축구계에서 챌린지 능력이 뛰어난 수비수는 많았지만 홍명보급의 커버 능력을 가진 선수는 드물었고, 심지어 당시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많은 편은 아니었다.
거스 히딩크 감독도 2002년을 준비하며 몇 차례나 홍명보를 4백 시스템에 끼워넣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끝내 히딩크가 홍명보를 버릴 수 없었던 건, 이미 수년간 익숙해진 탈아시아급이라 할만한 홍명보의 딥라잉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버릴 수 없었고 자신에게 알맞은 진형 위에 세워 놓으면 장점을 십분 발휘하며 태극전사들을 이끌어왔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홍명보가 국대의 중앙을 지휘하던 시기 홍명보 못지 않은 플레이메이킹 능력이 있는 윤정환, 신태용, 노정윤등 수많은 K리그 스타들은 국제무대에서 뛰기 부적합한 피지컬 때문에 일찍 배제되었었다.
게다가 홍명보는 90년대 수비수였다.
센터백으로 커맨드와 빌드업까지 갖춘 선수는 전세계에도 얼마 없고 한국에서는 홍명보 외엔 발기술이 좋은 센터백 자체가 없었다.
여기에 국제경기에서 2002년 월드컵때 대표팀 중원을 지킨 유상철과 김남일은 빼어난 경합능력과 수비력, 활동량으로 유럽선수들과 대등하게 맞설순 있었으나 홍명보처럼 날카로운 전진 패스를 활용한 빌드업 능력은 없었다.
따라서 홍명보를 버릴 경우 대표팀의 공격 루트는 투박한데다 성공률도 높지 않은 측면밖에 남지 않으므로 홍명보가 없으면 팀 운영이 불가능했다.
다행히, 홍명보에게 어울리는 3백을 구축하는데 성공한 2002년 국가대표팀은 여러가지 조건이 좋고 경기력과 홈 버프를 받아서 역대 최고의 성과를 내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홍명보는 커리어 내내 클럽에서는 피지컬 압박이 덜한 J리그에서 황제로 군림했고, 국가대표에서는 확실한 자신의 보디가드들을 두고 있어야 능력을 100%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축구의 가장 큰 명제인 압박의 문제로 인해 피지컬과 탈압박이 약했던 홍명보식 한국형 플레이메이커 즉, 몸싸움과 드리블보다는 패스로 빌드업과 경기 조율을 맡던 자리는 바로 뒷 세대인 윤정환, 이관우에서 한동안 끊어졌다가, 기성용이 이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홍명보와 플레이스타일이 완벽하게 같지는 않다.
기성용 문서에도 설명이 나와있지만, 롱패스를 활용한 빌드업과 넓은 시야 등으로 홍명보와 비교되기도 하고 피지컬과 볼 다루는 테크닉은 되려 우위이다.
다만 예측력과 위치선정 같은 수비 센스는 비교불가 수준으로 홍명보가 훨씬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성용이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수비적으로 비판받는 이유는 활동량만 많지 그 활동량을 적시에 써먹을 수 없는 위치선정의 약점 때문인데, 이 위치선정에서 홍명보는 정말 탁월함을 보였다.
홍명보는 국가대표 경기에서 그 순간적인 타이밍과 센스로 몇 번씩이나, 그야말로 한 골 막은 것과 같은 수비를 보여주었다.
그래서인지 홍명보는 스페인을 상대로 비교적 강한 모습을 보여 줄 때가 많은데 이는 스페인이 우리가 아는 티키타카 전술처럼 드리블과 패스 플레이 위주의 전술을 펴는 팀이기 때문.
이런 전술을 쓰는 일본이 홍명보의 수비망 앞에서 번번히 무릎을 꿇은 것처럼 스페인의 전술도 패스 차단에 도가 튼 홍명보 앞에선 상성 최악이기 때문.
이는 홍명보가 비에리의 폭력 축구(.
) 앞에선 이상하게 상당히 부진한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스피드의 경우 그렇게 빠르지는 않았지만 절대 느린 선수는 아니었으며 되려 수비 시 순간스피드와 가속력은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치달이나 오버래핑을 할 때 보면 단순 달리기 자체는 오히려 빠른 편이었다.
요약하자면 홍명보는 스피드, 피지컬이 부족해서 상황마다 적재적소의 움직임만을 해야만 했던 80년대 축구에 최적화된 앵커맨이나, 그 부족한 피지컬을 명민한 오감과 천재적인 수비지능으로 커버해 90년대 이후에도 상대방의 움직임을 묶어놓았으며 고작 이것만으로도 한국을 지휘하고, 경쟁력을 보여주었던 불가사의한 선수라고 할 수 있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정말 짜증나는 스타일이고, 실제로 써먹기도 어렵지만 안 쓰자니 정말 아쉽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유형의 선수였다.

 


3.1. 유럽 진출시 성공 가능성

 

위에서 서술한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홍명보가 유럽에 진출했다면 성공했을까?'는 축구팬들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논쟁거리였다.
우선 이야기에 앞서 그 당시 시대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과는 다르게 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유럽에 진출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 배경에는 세계 축구 사정에 어두웠던 국내 축구계의 현실이 있었다.
첫째로 유럽에서 통할만한 에이전트가 없었다.
당시 국내 에이전트들은 이적료와 연봉을 보장받으면서 유럽의 안정적인 팀을 보낼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1999년 한국은 총 4명의 에이전트가 있었는데 이중 가장 유명했던 사람은 이영중 이반스포츠 대표 였다.
이영중은 국내외 축구팬으로부터 'J리그 빠'라는 비판까지 얻었을 정도로 국가대표 선수들을 고액의 이적료와 연봉을 보장받으면서 J리그로 보내는데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이반스포츠 소속 황선홍, 홍명보, 노정윤, 유상철, 하석주, 김도훈, 윤정환 등 많은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J리그로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유럽 진출에선 현지 사정을 잘 몰랐던 건지, 협상력이 부족한 건지 하여튼 별 성과가 없었다.
프랑스 르 샹피오나 RC 스트라스부르의 서정원,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NAC 브레다의 노정윤,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라스크 린츠의 강철, 최성용, 독일 분데스리가 베르더 브레멘의 이동국 등이 이영중의 작품이긴 한데 이동국이 뛰었던 베르더 브레멘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얼마 지나지 않아 2부리그로 강등된 하위팀이나 중소리그의 팀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1990년대 국내에서 가장 실력있다는 에이전트의 능력이 이 정도였다.
(다만, 반대로 보면 검증되지 않은 아시아 선수를 써줄 만한 구단들은 이 정도였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으며 이걸 단순히 에이전트 능력만으로 보는 것도 어폐가 있다.
)둘째, 국내 프로팀들이 해외리그 진출에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이 당시 한국의 프로축구팀들은 선수들의 해외진출에 굉장히 폐쇄적이었다.
일단 과거에는 기본적으로 선수들의 해외 진출이 소속 구단, 더 나아가 우리나라 전력의 유출이라는 정서가 있었다.
거기다 1990년대 후반은 K리그 최고의 전성기로서 경기장이 팬들로 가득차던 시기였다.
팀 입장에서는 스타급 선수들이 하나 빠지는 것이 리그 성적 뿐만 아니라 관중 수에도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었다.
그 때문에 외국으로 나가겠다는 선수를 좋지 않게 볼 수 밖에 없었다.
홍명보의 자서전 표현을 빌리면 해외팀에 이적제의가 들어와도 소속 팀에 몇년 간 '봉사'를 해야 겨우 허락받아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셋째, 입단 테스트 거부도 한 몫했다.
당시에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은 최고의 선수라는 자존심 등을 앞세워 선수 본인 또는 소속팀이 입단테스트를 거부하는 경우가 꽤 많았다.
당시 선수들의 해외진출을 좋지 않게 보던 한국 프로팀들은 100만 달러 이상의 적지 않은 수준의 이적료를 제시했는데 실력은 검증 받지 않겠다고 하니 유럽팀들이 호구도 아니고, 남미와 아프리카의 이적료와 연봉이 낮고 실력이 훨씬 더 뛰어난 선수들 쪽으로 눈을 돌리는게 당연한 일이었다.
해외 진출이 어려웠던 시기에도 입단 테스트에 적극적이었던 서정원, 노정윤 같은 선수들이 유럽으로 진출했던 사례를 볼때 국내 축구계가 해외 사정에 조금 더 밝았더라면 차범근, 박지성, 손흥민까지는 못되더라도 유럽 프로팀에서 주전급으로 활약하는 선수들이 훨씬 더 많이 나왔을 것이다.
정리하면 우물안 개구리와 다름 없었던 국내축구계의 현실이 유럽으로 진출하고 싶은 선수들의 발목을 계속 잡아왔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2000년 무렵, 축구협회가 설기현 같은 유망주를 유럽으로 보내는 유망주 해외진출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2002년 히딩크 감독이 박지성, 이영표를 PSV 아인트호벤으로 데려가면서 점차 변화해 가게 된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면 홍명보가 만약에 유럽에 진출한다면 분데스리가 팀에 입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분데스리가는 독일의 프란츠 베켄바워, 로타어 마테우스, 마티아스 잠머, 옌스 노보트니, 스위스의 치리아코 스포르차, 노르웨이의 키에틸 렉달 등 ‘리베로’ 유형의 선수들이 많이 뛰던 리그이기 때문이다.
또, 분데스리가는 한 때 심재원과 홍정호가 진출했던 적이 있을 만큼 유럽의 다른 리그에 비해 동양인 출신 중앙 수비수를 영입하는데 거부감이 없다.
실제로 홍명보에 관심이 많았던 유럽 프로 팀들 중 분데스리가 팀이 꽤 있었다.
설에 따르면 카를스루에 SC, 헤르타 베를린, 함부르크 SV가 영입할 의사가 있었다고 한다.
카를스루에 SC는 1996년 여름 스위퍼 옌스 노보트니가 이적한 자리를 보강하기 위해 홍명보의 영입을 적극적으로 타진했다.
하지만 바이에른 뮌헨,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같은 독일의 명문구단에 입단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바이에른 뮌헨은 로타어 마테우스가,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은 옌스 노보트니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마티아스 잠머가 주전 스위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홍명보가 분데스리가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고 하면 빅클럽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이나 영입제의를 한 것으로 알려진 FC 바르셀로나에 입단했으면 성공했을까? 가능성은 반반이라 볼 수 있다.
성공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루이 반 할 감독의 존재다.
반 할이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있던 97-98 시즌 당시, 팀의 주장 펩 과르디올라는 부상 때문에 한 시즌 가까이 뛰지를 못했다.
과르디올라는 바르셀로나 전술의 핵심이었다.
4백 수비 바로 앞에서 수비라인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공격 전개의 시발점 역할을 했다.
과르디올라가 빠진다는 것은 기존의 전술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과르디올라가 부상 때문에 경기에 못 나왔던 시즌이 바르셀로나가 홍명보를 영입하려고 했던 바로 그 시즌이다.
반 할은 과르디올라의 부재로 인한 기존 전술의 공백을 아약스의 3-4-3 전술로 보완하려 하였으며 그 3백의 중앙에 뛸 선수로 홍명보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홍명보는 앞에 기술된 것처럼 스페인을 상대할 때 유독 강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조별리그 스페인전과 2002년 한일 월드컵 8강 스페인전을 기억해보자.
1994 월드컵 스페인전의 경우 직접 프리킥 골을 넣었고, 공격진 바로 뒤까지 올라가 서정원의 골을 어시스트했다.
2002 월드컵 8강 스페인전에서는 독일, 터키, 이탈리아 등 다른 강팀과의 경기와는 달리 단 한 골도 허용하지 않는 수비력과 정확한 롱패스를 바탕으로 한 빌드업 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실패 요인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반 할은 알베르토 자케로니처럼 3백을 고집하는 감독이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홍명보가 부진한 모습을 보일 경우 바로 4백으로 전환했을 것이다.
둘째, 동양인 선수가 프리메라리가 팀의 주전으로 자리잡았던 적이 거의 없다.
포지션이 다르긴 하지만 한국의 이천수, 박주영, 일본의 나카무라 슌스케 등 적지 않은 동양인 선수들이 프리메라리가에 진출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처절한 실패를 경험했다.
또 박지성, 유상철처럼 멀티 플레이가 가능하면 로테이션 멤버로 쓸 수 있지만 홍명보는 오직 3백에서만 자기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선수라서 감독의 성향과 맞지 않으면 벤치 멤버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튼 '홍명보가 유럽에 진출한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질문의 답은 열린 결말이므로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

 

4. 감독 스타일

 

홍명보의 감독으로서의 문제점은 홍명보호/논란과 평가, 홍명보호/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문서에 너무나도 잘 정리되어 있으니 이 문서들을 참고하자.
사실 너무 전술폭이 좁은 감독이라 전술에 관해 논하기 애매한 점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대표팀 감독 시절의 홍명보는 4-2-3-1을 응용한 두 줄 수비를 즐겨 사용했다.
국대 시절의 명보볼을 점유율 축구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오히려 기성용의 롱패스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전형적인 뻥축구+텐백에 가까웠다.
실제로 득점들도 대부분 뻥축으로 얻어낸 득점이 대부분이었고.
이 당시의 득점루트를 보면 기성용이나 김영권, 정성룡, 윤석영 등이 공을 높이 띄우면 제공권이 받쳐주는 박주영이 떨궈주고 공미인 구자철이나 측면 미드필더 자리로 내려간 윙어인 손흥민, 이청용, 지동원, 김보경 등이 순간적으로 공격라인까지 치고 올라가 주워먹는 패턴이었다.
여기까지 읽었으면 알겠지만, 철저히 윙어들을 갈아버리는 전술이다.
윙어들로 하여금 피치 끝에서 끝까지 왕복하게 하며 수비랑 공격을 번갈아 뛰게 해야 되는 전술이라 윙어들의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물론 손흥민, 이청용, 지동원, 김보경은 모두 강철체력으로 유명한 선수들이니 그렇게까지 비현실적인 전술은 아니지 않냐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체력만 문제인 게 아니란 게 문제다.
당시까지의 손흥민은 아직 포텐이 터지기 전인 유망주였고 이청용, 지동원은 부상으로 부진했으며 김보경도 폼이 엄청 떨어진 상태였다.
따라서 이들을 이용해 텐백+롱볼역습으로 빈약한 전력을 극복해 보려던 나름의 현실주의 노선 전술이 이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부진으로 완전히 만화축구로 전락해 버렸다.
애시당초에 구자철은 공미를 소화 못하고 어정쩡하게 처진 공격수에 가깝게 플레이했고 박주영은 분명 제로톱같은데 타겟터에 가깝게 뛰는 등 전체적으로 굉장히 괴상하게 돌아가던 팀이었다.
그리고 이 전술을 들고 나온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의 결과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후 자신의 너무나도 좁은 전술폭의 한계를 깨달은 것인지 울산 현대의 감독을 맡은 뒤부턴 4-1-4-1 등 전술의 변화를 주면서 개선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니, 오히려 2022시즌부터는 매 경기 다른 전술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상 K리그 감독들 중 가장 다채로운 전술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심지어 주전의 대부분이 출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남은 주전 멤버들의 과감한 포변과 교체 멤버들을 활용한 파격적인 용병술로 하늘이 대놓고 지라고 짜놓은 판에서까지 꾸역승을 해내는 스퀴즈 플레이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이분이 8년 전의 그 졸장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다.
안타깝게도 감독 스타일 상 기본적으로 욕을 많이 먹을 수밖에 없는 스타일이다.
새로운 선수에 대한 적응기간이 너무 길어서 원래 아는 선수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고, 말더듬이로 악명높은 홍명보답게 언변 능력이 워낙 딸려서 비호감으로 낙인찍히기 딱 좋다.
그리고 추억보정에 약해서 과거에 자신이 한번 믿어줬을 때 잘해줬던 선수가 지금 엄청 부진해도 이번에도 믿어주다 보면 잘하겠지 하고 굳게 믿으며 팬들이 제발 걔 좀 그만 쓰라 해도 끝까지 믿으며 기적이 일어나길 비는 경향이 있다.
2012 런던 올림픽 때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때 박주영을 끝까지 신임한 것이 대표적인데, 결과적으론 런던올림픽 땐 진짜 믿음 끝에 기적이 일어났지만, 브라질월드컵 땐 홍명보와 박주영 모두에게 최악의 결과로 끝났다.
용병술 솜씨는 미묘한 편이었다.
잘 쓸 땐 진짜 예지력이 있나 싶을 정도로 천재적이고 번뜩이는 용병술을 보여주지만, 못 쓸 땐 이건 뭐 병신도 아니고 하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황당한 용병술을 보여준다.
좋게 말하면 파격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뜬금없는 용병술을 보여주는 감독.
하지만 울산 부임부터는 진짜로 천재적인 용병술을 자주 보여주고 있다.
교체 선수를 투입하고 승리한 경기가 굉장히 많다.
그렇다고 홍명보가 명장병 걸린 감독이란 뜻은 또 절대 아니다.
홍명보의 뜬금포 용병술로 전해지는 사례들은 런던올림픽 시절 이범영의 군면제를 위한 골키퍼 교체나 인천전에서의 설영우 센터백 포변 등 대부분 그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냥 엔트리 선발 자체가 문제라고 하면 모를까 적어도 용병술 면에선 딱히 비판거리가 없다 보는 게 맞을 듯하다.
또한 울산 감독 부임 이후부턴 홍명보의 용병술이 하나같이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모습을 보여주며 적어도 용병술 하나만큼은 K리그 감독들 중 최상위권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이고 있다.
선수단 장악능력 하나만큼은 어지간한 월드클라스 감독급 레벨이라는 평을 받는다.
신기하게도 홍명보 감독 체제 하의 선수들은 하나같이 감독에 대한 엄청난 충성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대 국대 감독들을 보면 박종환 시절엔 최순호, 최인영, 이태호, 변병주, 박경훈이 무단이탈 사건을 일으켰고, 김호, 비쇼베츠 시절엔 홍명보가 항명을 했으며, 차범근은 울산 감독 시절 최강희와 대판 싸웠던 적이 있었고, 본프레레는 이을용과 불화를 빚었고, 조광래는 이청용에게 전술 관해서 디스를 당한 적이 있고, 최강희는 기성용을 위시한 해외파에게 아예 감독으로서 무시당하는 최악의 곤욕을 치렀고, 슈틸리케 시절엔 기성용과 차두리가 항명을 했으며 신태용은 성남 감독 시절 윤빛가람의 태업과 라돈치치와의 불화로 고생했으며 벤투 시절엔 이승우가 감독 앞에서 물병을 걷어차는 등 크던 작던 선수들이 감독을 무시하고 개기는 사건들이 있었는데 홍명보가 국대 감독이던 시절만큼은 신기하게도 이 골때릴 정도로 개성 강한 국대 선수들이 하나같이 순한 양 모드가 되어서 충성을 맹세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임 감독과의 불화로 엄청난 존재감을 보여준 기성용과 자기 친구와 불화를 겪고 캐삭빵을 하기도 했던 박주영 등등 성격 특이하기로 유명한 해외파 선수들을 모조리 품어내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그 악동집단인 해외파 선수들이 신기할 정도로 홍명보 체제에선 큰 말썽 없이 조용했다.
심지어 월드컵 마지막 벨기에전 이전까진 계속 벤치에만 앉아 있었던 김승규, 김신욱과 부상에도 불구하고 감독 명령에 악깡버로 뛰어야 했던 홍정호 등은 홍명보에게 서운한 감정이 있었을 법한데도 홍명보가 사퇴할 때 격렬히 반대의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고, 대표팀 내의 파벌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정했던 곽태휘 역시 홍명보를 은근히 실드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저 선수들이 대인배인 게 제일 크긴 하겠지만 그래도 위 사례들이랑 비교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다고 홍명보가 김호, 박종환같은 소위 '호랑이' 스타일은 아니다.
대표팀 선수들의 증언에 의하면 오히려 화를 거의 안 내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심지어 세간에 알려진 꼰대 이미지와 정반대로 선수들과 편한 관계를 유지하며 군기도 널럴하게 잡는 편이라고 한다.
이 자칫하면 호구잡히기 쉬운 성향 탓에 당시 수비코치인 김태영이 총대메고 군기반장 노릇을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김태영이 선수들을 잡고 다니자 오히려 김태영이 홍명보에게 애들 잡지 말라고 혼났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근데 그렇다고 홍명보가 덕장이냐? 덕장이라 부르기엔 애매하다.
일단 마틴 오닐이나 해리 레드냅마냥 쓸 놈만 쓴다 주의의 아집에다가, 코치 시절 미들즈브러에서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내던 이동국을 2007 아시안컵에 데려가기 위해 간청하거나 월드컵 시절 부상의 여파로 폼이 엉망이던 홍정호, 김영권, 곽태휘를 악깡버로 경기 강제로 뛰게 하는 등 쌍팔년도 스타일 기질도 있다.
그렇다고 또 그렇게까지 무지성으로 까라면 까주의자인 건 아니고, 선수들을 챙겨줄 땐 확실히 챙겨준다.
덕장과 독재자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미묘하다.
사실 홍명보가 선수들에게 안 먹히고 대접받는 것은 국대 레전드 출신 감독이라는 메리트 덕택인 게 커 보인다.
카리스마고 뭐고 딴 거 다 집어치우고 그 팀에서 엄청난 업적을 남긴 대선배인데 후배들 입장에선 말 안 듣고 배기나 참고로 해외에서도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앨런 시어러, 젠나로 가투소, 게리 몽크 등 구단 레전드가 그 구단 감독을 맡는 일이 종종 있는데 감독으로서의 성패와 별개로 높은 확률로 선수단을 제대로 장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특유의 느낌을 쉽게 설명하자면, 군대에서 일이병 시절 군생활 가장 열심히 하던 에이스가 말년 되면 후임들에게 화 안 내고 착해빠지게 행동해도 후임들이 알아서 선임으로서 대우하는 경우랑 비슷하다 보면 된다.
여기에 감독 말 들으면 군면제라는 최고의 포상까지 더해지니, 선수들 입장에선 충성을 안할 수가 없다.
이런 특징들 탓에 국대감독 시절을 기억하는 국민들은 (감독으로서의) 홍명보를 안 좋게 보지만 정작 현장에서 뛰는 선수들은 가장 존경하는 은사로 홍명보를 꼽는 것에 대해 이견이 없다.

 


5. 아시아의 베켄바워?

 

결론부터 말하자면 홍명보가 프란츠 베켄바워를 롤모델로 의식하고 있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이는 홍명보의 자서전을 보면 명확히 드러나는데, 자신의 수많은 별명 중 아시아의 베켄바워라는 별명을 제일 먼저 올려놓았다.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홍명보 본인이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별명이라는 얘기이다.
마치 한국의 수비수들이 홍명보를 존경해서 제2의 홍명보라는 별명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듯, 홍명보도 베켄바워를 존경해서 아시아의 베켄바워라는 별명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
일단 당시의 한국과 일본의 축구팬들은 홍명보를 진짜로 아시아의 베켄바워라고 인식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사실 선수로서의 홍명보와 베켄바워는 선수로써의 클래스는 둘째치더라도 플레이스타일이 많이 다르며 홍명보는 사실 리베로라고 부르기도 힘들다.
물론, 홍명보의 실질적인 포지션이 바이에른 뮌헨식 앵커맨이었고 베켄바워도 이 포지션에서 자주 뛰었던 걸 생각하면, 아시아의 베켄바워라는 호칭도 완전 엉터리는 아니라 볼 수 있다.
또한 홍명보는 자기 자서전에 본인은 은퇴한다면 감독이 아닌 행정가 쪽으로 가고 싶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 책이 나온 시점인 2002년 월드컵 직전은 바로 베켄바워가 DFB 수뇌부이자 FIFA 핵심 인사 중 한 명으로서 화려하게 활약하고 있던 시점이다.
특히 베켄바워는 자신의 충실한 오른팔인 페도르 라트만을 대동해 역사상 가장 깔끔한 월드컵 유치전 승리를 거머쥐는 등, 그야말로 축구행정가로서는 전성기를 찍던 시점이다.
그리고 베켄바워는 스타플레이어 출신 행정가 중에선 가장 성공한 케이스이다.
그나마 미셸 플라티니가 베켄바워랑 비슷한 위상까지 올랐던 스타플레이어 출신 축구행정가이나, 막후 거래와 관련해서 말은 많아도 적어도 일은 잘한다는 평을 받는 베켄바워와는 달리 플라티니는 부패한데다가 일도 못한다는 평을 듣는 것을 보면 사실상 베켄바워 말고는 세계구급 축구행정가로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스타플레이어는 없다 봐도 좋다.
홍명보도 그런 베켄바워를 보며 내심 그를 배우고 싶다고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베켄바워는 선수뿐만 아니라 감독으로서도 성공한 감독이란 것.
홍명보는 베켄바워랑 비교하면 감독 경력은 정말 초라하다.
물론 2012 올림픽 동메달과 같은 영광의 순간도 있었지만 2014 월드컵이나 항저우 뤼청 감독 시절처럼 안 좋은 기억이 많았다.
어쨌거나 홍명보는 베켄바워가 거쳤던 길인 스타플레이어 → 명장 감독(?) 올림픽 동메달 땄으니 그냥 그렇다 쳐주자.
→ 행정가 수뇌부의 길을 착실하게 밟고 있다.
적어도 행정가로 뽑히는 선임 과정에 관해선 굉장히 논란이 많은 홍명보였지만 그가 행정가로 일했을때는 유능하단 평을 들었었다.

 

5.0.1. 대회 기록

 

  • 상무 축구단 (1991)전국실업축구연맹전: 1991 후기
  • 전국실업축구연맹전: 1991 후기
  • 포항제철 아톰즈 / 포항 아톰즈 / 포항 스틸러스 (1992~1997, 2002)K리그: 1992FA컵: 1996리그컵: 1993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1996-97
  • K리그: 1992
  • FA컵: 1996
  • 리그컵: 1993
  •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1996-97
  • 가시와 레이솔 (1999~2001)J리그컵: 1999
  • J리그컵: 1999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FIFA 월드컵 4위: 2002AFC 아시안컵 3위: 2000아시안 게임 동메달: 1990다이너스티컵: 1990
  • FIFA 월드컵 4위: 2002
  • AFC 아시안컵 3위: 2000
  • 아시안 게임 동메달: 1990
  • 다이너스티컵: 1990
  • 대한민국 유니버시아드 축구 국가대표팀하계 유니버시아드 금메달: 1991
  • 하계 유니버시아드 금메달: 1991

 


5.0.2. 개인 수상 기록

 

  • FIFA 올해의 선수 후보: 2002 (17위), 1996 (21위)
  • FIFA 월드컵 브론즈볼: 2002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2002
  • FIFA 월드 XI: 1997
  • AFC 아시안컵 베스트 XI: 2000
  • AFC 아시안 올스타: 1997, 2000
  • K리그 MVP: 1992
  • K리그 베스트 XI: 1992, 1994, 1995, 1996, 2002
  •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XI: 2013
  • K리그 공로상: 2012
  • J리그 베스트 XI: 2000
  • J리그 올스타: 1999, 2000, 2001
  • KFA 대상: 2009
  • 백상체육대상 대상: 1994
  • FIFA 100: 2004
  • AFC 명예의 전당: 2014
  • AFC 아시아 월드컵 역대 베스트 XI: 2020
  • IFFHS 20세기 아시아 남자팀: 1901–2000

 

5.0.3. 서훈

 

  • 체육훈장 맹호장: 2002

 


5.0.4. 클럽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리그컵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92
포항제철 아톰즈
한국프로축구대회
29
1
-
-
8
0
1993
포항제철 아톰즈
한국프로축구대회
11
1
-
-
1
0
1994
포항제철 아톰즈
코리안리그
17
4
-
-
0
0
1995
포항 아톰즈
코리안리그
24
1
-
-
7
0
1996
포항 아톰즈
프로축구대회
29
7
0
0
5
0
1997
포항 스틸러스
프로축구대회
0
0
0
0
6
0
1997
벨마레 히라쓰카
J리그
10
0
3
1
0
0
1998
벨마레 히라쓰카
J리그
32
2
2
0
0
0
1999
가시와 레이솔
J리그 디비전1
28
5
4
2
5
2
2000
가시와 레이솔
J리그 디비전1
29
2
2
0
2
0
2001
가시와 레이솔
J리그 디비전1
15
0
0
0
3
0
2002
포항 스틸러스
K-리그
19
0
0
0
0
0
2003
LA 갤럭시
메이저리그 사커
25
0
2
0
-
-
2004
LA 갤럭시
메이저리그 사커
31
0
0
0
-
-

 


5.0.5. 국가대표

 

연령
출전
U-17
0
0
U-20
0
0
U-23
1
0
A대표
136
10
합계
137
10

 

5.0.6. 대회 기록

 

  •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2009~2012)하계 올림픽 동메달: 2012아시안 게임 동메달: 2010
  • 하계 올림픽 동메달: 2012
  • 아시안 게임 동메달: 2010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13~2014)EAFF 동아시안컵 3위: 2013
  • EAFF 동아시안컵 3위: 2013

 

5.0.7. 개인 수상 기록

 

  • K리그 이달의 감독상 - 2021년 8월, 2022년 3월

 


5.1. K리그 드래프트 파동

 

홍명보는 이미 고려대 시절 1990 월드컵에 출전하면서 대표팀의 차후 10년을 책임질 핵심 선수로 떠올랐다.
이에 드래프트 판에 나올 경우 모든 팀의 관심이 집중될 대어였으나 홍명보는 황선홍과 더불어 선수 본인이 가고 싶은 팀에 입단할 수 없다는 점과 계약금과 연봉이 타 종목에 비해 낮게 책정되었다며 드래프트 거부 선언을 했다.
그리고 포항제철이 꼼수를 부려 산하 아마추어팀에 황선홍과 홍명보를 입단시킨 후 포항제철 소속 선수로 맞아들였다.
이는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동시에 아마추어팀 입단에서 3년이 지날 때까지 경기에 나올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황선홍과 홍명보를 포항이 해외 유학을 보내기로 발표하며 일반 팬들에게까지 파문이 확산되었다.
이후 황선홍은 해외 유학을 떠났고 홍명보는 상무에 입대한다.
그러나 여론과 타 구단의 반발을 이기지 못한 포항은 홍명보의 상무 전역 후 드래프트 시장에 내놓게 되었고 홍명보는 유공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나 홍명보는 이미 포항에게서 1억을 상회하는 돈을 받았기에 유공으로 가는 건 포항제철의 책임자들에게 있어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결국 포항은 기존 포항 선수와 더불어 그해 드래프트 1, 2순위자들과 유공의 홍명보를 1:3 트레이드하며 홍명보를 데려오게 된다.
그리고 포항은 15년 후 홍명보의 고려대 후배 선수에게 뒤통수를 맞는 부메랑 효과를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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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LA 갤럭시 이적 관련 태업 논란

 

포항은 2002 월드컵 대표팀 4강 주역인 홍명보로 포항의 가치를 상승시키고 싶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적은 생각치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해외진출을 꾸준히 시도해온 홍명보는 MLS로 이적하고 싶었고, MLS로의 이적의지를 천명했다.
포항은 금시초문이었는데 홍명보와 LA 갤럭시 간의 개인협상은 끝난 것처럼 보이는 정황이었다.
포항은 뭔 소리냐는 반응으로 해왔던대로 홍명보의 이적 의사를 일축했으나 홍명보는 이에 백태클 퇴장으로 대표되는 태업으로 응수했으며, 장외에서는 언플 및 개인 팬클럽 등의 활발한 활동으로 대승적 차원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구단이 졸렬한 것처럼 보이게 압박했다.
결국 포항은 이적료로 100만 달러를 요구했는데 LA 갤럭시에서는 36만 달러밖에 주지 못한다는 의견을 고수했다.
결국 홍명보 본인이 파기 위약금을 물고 자유계약으로 이적했다.
나이를 감안해도 바로 6개월 전 월드컵에서 브론즈볼을 수상한 선수에게 36만 달러가 적당한 이적료는 아니었다.
이때 묘한 언플로 마치 포항은 홍명보를 공짜로 J리그에서 데려왔는데 돈장사한다고 욕먹었으나, 기실 홍명보의 이적에 공식 이적료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당시 가시와와 홍명보의 남은 계약기간 동안 홍명보가 받을 수 있는 연봉이 100만달러였고 포항이 이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이적이 발생했던 것이다.
즉 단 반시즌만 뛴 홍명보를 포항이 36만달러에 보내주면 포항은 자기 맘대로 이적 안 시켜준다고 태업질을 일삼으며 여론을 조종해 팀을 뒤흔든 선수를 6개월 동안 쓰기 위해 64만달러 + 6개월어치의 연봉(필시 포항 출신임과 더불어 4강 영웅이자 주장임을 내세워 최고급 대우를 해줬을 테니 연봉 10억 이상도 생각할 수 있는 만만찮은 액수)이라는 거대한 비용을 지불했어야 하는 꼴이 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는 위약금만 물면 언제든지 자유계약 신분이 되어 이적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점이다.
여튼 이 사건으로 포항에서 홍명보에 대한 평가가 급락하게 되고 지금도 이 사건을 아는 포항 올드팬들에게는 욕을 먹는다.
황선홍도 도피성으로 J리그 가면서 이미지가 안 좋아졌던 시절도 있긴 했지만, 적어도 이런 식으로 깽판을 치면서 가지는 않았다.
은퇴 이후에도 포항에 애정을 보여주며 감독까지 된 황선홍과는 달리 되려 포항이 울산 다음으로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서울 구단에 관심을 더 많이 보여주면서 스스로 이미지 악화에 일조했다.
자서전에서도 자신은 포항의 레전드는 아니고, 가시와 레이솔의 레전드는 될 수 있겠다고 쓴 바 있다.
다만 포항 구단이 일방적 피해자인 것은 아닌데, 분데스리가, FC 바르셀로나와 같은 명문리그, 구단으로의 해외 진출을 완강하게 막아, 홍명보가 J리그로 갈 수 밖에 없어 선수 커리어에 막심한 손해를 본 것을 생각한다면 일종의 자업자득이다.
그러나 포항이 얼마나 공들여 홍명보를 데려왔는지, 데려와서 군대 보냈다 어쩔 수 없이 드래프트 시장에 내놓은 뒤 1:3 트레이드로 다시 데려왔는가는 이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
이 때 뭔가 저주라도 받은 건지 포항은 홍명보에 이어 또 다시 통수를 한 번도 아니고 네 번이나 더 맞게 된다.
김 모씨-박주영-오범석에 이어 2014년에 황희찬까지.

 

5.3. 잦은 항명 및 태업 의혹

 

과거 전 29만원의 그것를 본딴 사조직 '열하나회'의 멤버로서 대표팀내 영향력을 행사하며 가입하지 않는 선수에겐 불이익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있다.
다만 '열하나회'에 대해선 다른 설도 존재한다.
열하나회는 애당초 유소년 축구를 지원하고 축구선수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평범한 모임이며 하나회를 모델로 만든 것이 아니라 베스트 일레븐의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열하나+회라고 했다는 것이고, 하나회와 연결 지은 건 1996년 아시안컵에서 대표팀의 부진에 뿔이 난 몇몇 언론의 왜곡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열하나회가 크게 문제가 된 건 1995년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에서 준결승 잠비아전을 앞두고 술집에서 술을 먹은 음주파동과 1996년 아시안컵에서의 부진 특히 8강 이란전에서 전반까지 2:1로 멀쩡히 앞서가다가 후반에 탈탈 털리면서 2:6으로 참패한 식스투 참사 때문이었다.
당시 이 두 사건에 대해 홍명보가 열하나회를 주축으로 하여 박종환 당시 대표팀 감독을 무시하고 고의로 태업을 벌였단 의혹을 받았다.
다만 박종환 감독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지휘방식에 불만을 품고 벌인 일이라는 설과 식스투 참사에 한정해 그저 체력이 떨어져서 털렸다는 설도 있다.
특히 식스투 참사가 일어난 1996년 아시안컵의 경우 당시 홍명보와 스리백을 구성한 두 수비수 중 허기태는 비록 열하나회 회원 가입은 늦었지만 홍명보의 고대 1년 선배이고 이영진은 대구대 졸업반까지 듣보잡 취급 당하다가 일화 입단 이 후 주전 수비수에서 국가대표로 초고속 승진해 박종환의 양아들로 통하던 선수였기 때문에 홍명보가 태업을 선동했다는 주장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애당초 히딩크 이전 한국 대표팀은 토너먼트에 맞는 체계적인 체력 트레이닝 없이 우리는 체력이 강하다는 막연한 인식속에 구 일본군식 정신론만 내세웠고 당시 한국대표팀은 시즌 직후 체력이 고갈된 상태였기에, 그냥 후반전에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졌을 가능성이 사실 가장 높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대표팀에서 사조직에 관한 구설이 흘러나온 것과 특히 음주파동을 일으킨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크게 비판 받아 마땅한 부분이다.
열하나회가 홍명보와 연결되어 아직도 이야기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1996년 이전에도 이후에도 홍명보는 감독과 유독 불화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1996년 이전에는 비쇼베츠 감독과의 불화가 대표적으로 꼽히는데, 올림픽 대표팀에 와일드카드로서 합류가 유력시됐으나 불발되고 만 것이 감독의 출장명령을 대놓고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비쇼베츠 감독이 한국 문화에 매우 잘 적응하지는 못했던 점, 그리고 당시 윤정환을 중심으로 팀을 만드려고 했던 것이 그 불화의 원인이 아니었나 추측되곤 한다.
이후에는 1998 프랑스 월드컵 감독 차범근,, 2002 월드컵 감독인 히딩크와도 당시 크게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딕 아드보카트는 아드보카트 감독님이라고 부르는데 히딩크는 히딩크 감독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롤모델은 아드보카트라고 자주 얘기해왔다.
다만 아드보카트를 만난 건 선수를 은퇴하고 코치가 된 이후였다.
그런데 후술할 내용에 의하면, 히딩크와는 크게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히딩크가 감독을 맡던 안지 마하치칼라 팀에 가서 코치 연수를 받았던 것을 보면 그렇다고 나쁜 관계인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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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브라질 월드컵 관련 논란

 

홍명보호/논란과 평가 참고.

 

5.5. K리그 선수 비하 발언 논란

 

"우리나라에 A급 선수들이 있는데, 이 선수들은 유럽에 나가면 거의 B급대 선수들이 있고요.
우리 K리그에 있는 선수들은 그 밑에 있는데, 과연 잘하는 선수가 유럽에 나가서 경기를 하지 못하고, 지금 그 선수들보다 조금 수준이 떨어지는 선수가 경기를 하고 있을 때 과연 이거를 어떻게 선수 구성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었고….
"홍명보는 감독이 될 때 활동 리그와 관계 없이 소속팀에서 꾸준히 뛰는 선수를 기용하겠다는 원칙을 스스로 세웠다.
그러나 그가 선발한 월드컵 선수단 중에는 박주영, 윤석영, 지동원 등 이 원칙과 맞지 않는 일부 유럽파들이 있었고 대회에서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자 논란이 되었다.
따라서 브라질 월드컵을 치룬 후 이에 대한 이유를 묻자 A급(유럽 리그)에 속해있지만 뛰지 못하는 선수를 B급이라고 지칭하더니 K리거들은 그보다 못한 급이라고 발언하여 파문이 일어났다.
선수들의 객관적 실력 면에 있어서 유럽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 더 나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그 말이 사실이라 해도 K리그의 선수들과 팬들이 상처를 받을 수 있는 표현이었다.
그나마 대표팀 내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준 선수들 중에는 이근호, 김신욱과 같은 K리거들도 있었는데 그들에 대한 존중이 부족한 발언이었다.
심지어 홍명보 본인의 선수 경력도 유럽에서 뛰어본 적이 없고 선수 경력 대부분을 K리그에서 보낸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B급 미만 선수였다고 자아비판한 셈이다.
그리고 2021년부터는 본인이 B급 미만이라고 깎아내렸던 K리그 팀인 울산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물론 취임 시점까지 이 발언에 대한 해명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때문에 울산의 팬들은 속이 뒤집어지고 있으며, 타 K리그 팀의 팬들도 "B급 미만 선수들로 뭘 하려나"하며 비아냥 중.
홍명보 감독님, 'B급 발언' 해명하셨나요?"(해당 발언이) 사임하는 자리에서 나온 것 같은데, K리그를 비하할만한 여유와 이유가 없었다.
나의 발언이 K리그 팬들에게 상처를 줬다.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다.
나는 K리그를 통해 프로에 데뷔했다.
지금까지 아시아를 선도하는 리그를 비하하거나 깎아내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축구인으로서 K리그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갖고 있다.
당시 발언으로 실망하셨을 팬들에게 다시 한 번 사과드린다.
울산 감독으로 어떤 진심을 갖고 있는지 보여드리겠다.
"2021년 1월 7일에 울산 감독 취임식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해명과 함께 속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팬들의 여론은 일단 지켜보자는 분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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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러시아 월드컵 방송 3사 해설위원 비판 논란

 

2018년 7월 5일 열린 대한축구협회 기자 간담회에서 한 발언이 논란이 되었는데, 주 요지는 "해설위원들이 첫 월드컵부터 계속 월드컵에서 성공만 해본 사람들이라 선수들이 못하는 것에 대해 공감이 떨어지는 것 같다.
(감독이 되어) 현장 경험을 하고 오면 더 좋은 해설이 될 것 같다.
"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이 들리기에 따라서는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당시 한국 지상파 방송사 해설위원인 안정환, 이영표, 박지성에게 "감독 안 해봤으면 말을 하지 마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한 "2002년의 성공은 그동안 실패했던 선배들이 힘을 모여서 된 것이고, 세 해설위원은 그것을 토대로 첫 월드컵부터 성공을 경험하고 그걸 바탕으로 이후에도 계속 월드컵에서 성공만 했다" 라며 월드컵 기간 중 해설위원들의 지적 및 개선 요구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뉘앙스의 말을 남겨 각 언론 및 네티즌들로부터 질타를 받았다.
홍명보 KFA 전무의 뼈있는 조언 "방송 3사 해설위원, 현장 어려움을 경험해야 한다"홍명보의 말대로 세 선수들이 2002 한일 월드컵에서의 성공 이후 국가대표에서 계속 성공적인 결과를 낸 것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2002 한일 월드컵의 성과로 높아진 국민들의 눈높이 때문에 대표팀 경기력이 그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을 때 욕을 먹었고 그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는 부담을 갖기도 했다.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사상 첫 원정 첫 승의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결국 1승 1무 1패로 예선 탈락하는 아픔을 겪었고 당시에도 16강 진출 실패라며 성공이 아닌 실패라 언급되었다.
또 원정 사상 첫 승을 거두는 성과에 대해서도 그 1승의 상대가 3패를 당한 토고라며 폄하되었다.
또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원정 사상 최초로 16강 진출(최종순위 월드컵 15위)을 달성했지만 높아질대로 높아진 기대치에 16강 진출이 당연하게 생각되어 큰 환호를 받지도 못했다.
오히려 8강 진출 실패라며 염기훈이나 이동국, 허정무 감독 등이 큰 비판을 받았다.
지금에서야 다시 1990년대로 돌아가 16강 진출이 원래 어려운 것이다란 인식 하에 평가받지만 2006 독일 월드컵, 2010 남아공 월드컵 때의 16강 진출은 전 대회 4강 팀으로서 당연히 달성해야 할 목표였다.
그러나 이는 FC 코리아가 먼저 반성해야할 문제이며 2002년 이전에는 승리 자체가 없었으니 홍명보 입장에서 매번 승리를 거둔 이후 월드컵들은 성공이라 볼 수 있었다.
홍명보 감독의 발언과는 별개로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때의 해설진이 실망스러운 해설을 보여준 건 사실이기는 하다.
이영표는 2014년 때의 일침갑, 초롱도사는 온데간데없고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것 같은 이상한 염불이나 외우고 있었고, 안정환은 2014년에도 해설 면에서 좋은 평을 못 들었는데 2018년에도 해설가로서 성장한 점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박지성은 아예 해설이 너무 재미가 없다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문제는 이런 세간의 해설진 평가에도 홍명보의 해당 발언 이후 여론이 바뀌어 홍명보가 욕먹었던 것.
여담으로 홍명보의 이 발언 이후 안정환은 간접적으로나마 선배한테 한 소리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해설하는 내내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해설의 질이 좋지 않아서 비판을 받은 것도 한몫을 한다.

 

5.6.1. 비판 의견

 

홍명보는 과거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당시 월드컵 감독의 자격으로 MBC를 찾아 안정환과 송종국에게 "해설은 너희 생각대로 하면 된다.
좋은 얘기만 하면 안되고 쓴 소리도 해라.
쓴 소리를 듣는 게 전혀 불편하지 않다.
그건 바로 너희 역할"이라고 조언한 바가 있어, 4년 만에 자신의 말을 180도 뒤집고 후배들에게 일침을 놓게 되어 다시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신태용호가 해설진한테 팩트, 노팩트 거르고 맹목적으로 여러 매체에서 두들겨 맞는 걸 보고 4년 전의 자신이 생각나 안타까워 제대로 알고 비판하라고 나름의 쉴드를 쳐주기 위한 의도로 보이지만, 국가대표팀을 향한 제대로 된 변호를 해주는 것이 아닌 너희들이 뭘 아냐는 식으로 비칠 수 있는 공격적인 발언을 해버리니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
이미 안정환, 박지성, 이영표는 2000년대 한국 축구를 10년 가까이 이끌어갔다.
오히려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높아진 기대치로 많은 부담감 속에서도 어느 정도 국민 기대치에 부응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에 이어서 반드시 지도자나 행정가가 되어 계속해서 한국 축구를 위해 뭔가를 할 필요는 없다.

 


5.6.2. 옹호 의견

 

홍명보의 발언이 세 해설위원과 그 팬들에게는 불편하게 비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일리가 없는 발언은 아니다.
세 선수의 은퇴 이후 행보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들이 축구인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자리는 열려있기 때문에 비판을 할 거면 비판만 하기 보단 그 알고 있는 문제들을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이 대한축구협회에 들어가면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협회 또한 좋은 인재를 찾아서 영입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다.
매번 축구협회의 물갈이를 외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FC 코리아를 포함한 팬들인데 이 문제에 대해 본인들이 홍명보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당시 안정환은 K리그 홍보대사로 일한 경력은 있었으나 주로 방송인으로서 활동을 했다.
박지성은 대한축구협회 유스전략본부장이었다고는 하나 현장이 아닌 자택 근무였으며 제대로 활동했는지 여부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이영표 또한 은퇴 이후 특별히 축구인으로서 기여한 것은 없었다.
홍명보는 밖에서 쓴 소리만 하는 이들이 충분히 서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홍명보는 브라질 월드컵 이후 안정환을 코칭스태프로 합류시키려 했으나 결국 사임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2021년부터 박지성과 이영표는 각자 전북 현대 모터스와 강원 FC에서 간부로 활동하게 되었다.
2002 한일 월드컵의 선수들이 혜택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월드컵이기에 거스 히딩크라는 전 대회에서 팀을 4강으로 이끈 명장을 데려오고 월드컵의 성공을 위해 K리그를 중단하는 등의 축구협회와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거스 히딩크라는 명장을 만나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선수들의 실력이 업그레이드되고 월드컵의 성공으로 병역 특례와 함께 여러 선수들의 유럽 진출의 길이 열리는 등 국가적인 혜택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이전의 한국 축구는 제대로 된 지원 없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오직 투혼으로 결과를 바라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6. 홍명보에 대한 말 말 말

 

"홍명보는 한국의 기형적인 시스템이 낳은 기형아이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저런 선수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1994 미국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 해설자"홍명보가 만일 지금 다시 축구를 시작한다면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유럽에서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다.
그러나 지금 늦었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인터내셔널해럴드트리뷴(IHT)의 칼럼리스트 랍 휴스"마치 두 명의 말디니가 서 있는 것 같군요.
"이탈리아 해설자, 세계 올스타 경기에서 파올로 말디니와 함께 수비를 조율하는 홍명보를 보고"나폴리를 떠나 유벤투스로 가게 된 치로 페라라의 자리를 홍명보로 메우고 싶었는데 안타깝다.
"SSC 나폴리 구단주, 1994년 홍명보의 영입에 실패한 후"한국이 예선탈락한 것은 결코 한국 축구가 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차범근 감독은 홍명보같은 유능한 선수를 몰라봐 그를 공격수로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나톨리 비쇼베츠"그 주장(홍명보)의 플레이를 정말 좋아한다.
경기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는 뛰어난 수비수다.
그런 수비수가 있어서 한국 축구가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 같다.
"리오 퍼디난드"골대를 지키고 있다 보면 앞에 선 등번호 20이 얼마나 크게 보이는지 모른다.
"미나미(가시와 레이솔 골키퍼)"좋은 선수는 많지만 위대한 선수는 많지 않다.
위대한 선수란 뛰어난 실력과 더불어 성품, 태도, 마음가짐 모두가 균형을 이루는 선수다.
그런 면에서 선수 홍명보는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역대 최고의 수비수로 앞으로도 기억될 것이다.
"이영표"선수 시절 홍명보에게서 나오던 아우라는 김민재도 따라하기 힘들 것이다.
실력도 정말 좋아서 전성기였다면 유럽 5대리그 빅클럽에서도 기용되었을만한 선수라고 생각한다.
"이천수.

 


7. 이야기들

 

  • 표정짤. 어딘가 이상한데? 이 말 보고 한번 더 본 사람 많을 것이다.
  • 위 : 2012 런던 올림픽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서 8강전에서 영국을 승부차기로 꺾고 4강 진출을 확정짓고.아래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국가대표팀 주장으로서 8강에서 마지막 승부차기를 성공짓고 난 후다.
  • 위의 짤에서 보이듯이 사적인 자리에서도 표정 변화가 거의 없으며 침착하고 과묵한 성격이다. 결혼을 한 뒤 아내와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라서 홍명보의 아내는 가끔 인형과 대화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고 홍명보의 자서전인 '영원한 리베로'에서 직접 언급했다. 참고로 선수시절 나온 TV프로그램에서 직접 밝히길 프로포즈는 "김치찌개를 잘 끓이니까 앞으로도 계속 끓여줘"였다고 핬다. 근데 이런 스타일의 인물은 입만 열면 지혜가 드러나는 명언이 술술 쏟아져 나오는데, 홍명보는 오히려 입만 열면 논란을 키우니 그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조차 제발 입 다물라 할 정도로 정반대라 할 수 있다. 본인 특유의 논란을 몰고 다니는 화법을 잘 알아서 말을 안 하는 걸지도 모른다. 울산에 부임할 쯤에는 다소 누그러져서 웃는 표정을 비교적 잘 보여주고 있다.
  • 팀에서의 등번호는 20번. 처음 국가대표로 출전했을때부터 달았던 번호로 황선홍의 18번과 함께 홍명보를 상징하는 번호로 자리잡았다. 올레 군나르 솔샤르와 함께 가장 유명한 20번 선수로서 한국 축구 한정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등번호가 되었다. 홍명보가 은퇴하자 그를 존경했던 포항 후배 이동국이 이어받았고, 이동국의 국가대표 차출이 불안해지자 제 2의 홍명보라 평가를 받는 홍정호가 이어받았다. 지금도 전통적인 의미에서는 공격수가 주로 다는 20번을 수많은 한국 수비수들이 너도나도 다는 것을 볼 수 있다.
  •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프랑스에게 5-0으로 진 경기에서 프랑스의 스트라이커 니콜라 아넬카에게 "와 봐! 새X야!"라고 소리쳤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에 떠도는데, 사실 이는 거짓이다. 애초에 말 자체가 별로 없는 홍명보가 처음 보는 사람한테 욕설을 하는 모습이랑 매치가 되는가?
  • 홍명보가 홍명바로 둔갑한 사건이 있었으니. 8강 스페인전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4:3 상황에서 호아킨의 슛이 이운재에게 막혀 대한민국의 4강 진출 가능성이 높아지자 KBS의 서기철 캐스터가 흥분한 나머지 홍명보를 홍명바로 발음한 것.
  • 놀랍게도 홍명보를 주인공으로 한 일본만화가 존재한다. 제목은 홍명보 이야기. 이 만화는 2002 한일 월드컵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만화이며 작가는 닥터 노구치의 작가인 Toshiyuki Mutsu가 그렸다. 한마디로 작가가 홍명보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정성껏 만든 만화책이다. 스펀지 시즌1에서도 다룬 바 있다.
  • 어게인!!의 작가 쿠보 미츠로가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연재한 만화 3.3.7 박수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학교선배이자 상사인 우메의 모티브가 홍명보라고 작가가 직접 밝혔다. 위의 닥터노구치 작가 작화에 비하면 꽤 많이 닮긴 했지만 차이점도 존재하는데, 우선 특유의 오대오 직모장발이 아닌 사카타 긴토키를 연상시키는 샤기컷 백발이며 맹한 눈빛의 우메와는 달리 홍명보는 상대의 이마를 히트비전으로 꿰뚫어 버릴 정도로 강렬한 눈빛의 소유자이다.
  • 두 아들의 이름은 홍성민과 홍정민이다. 여기서 둘째의 이름이 잘못적혀 이런 이야기가 나온 듯 하다.
  •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에서 요술봉의 이름이 되기도 했다. 이는 봉(보)의 일본어 발음을 이용한 말장난 개그. 원작에서는 4권 제 51막에서, 애니메이션에서는 1기 9화에 등장. 변신시 사용자의 아버지를 누드로 만든다. 여담이지만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만화 자체에서 한국인 이름을 엉뚱한데다 많이 쓴다. 월간 최홍만, 월간 최지우,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라 할 수 있는 소드마스터 야마토가 연재된 월간 최용수가 있다. 거기에 위 짤방은 축까들이 홍명보 및 홍명보호를 깔 때 등장하기도 한다.
  • 네이버 지식인에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네이버 지식인 홍보 차원에서 각계 유명 인사들이 네티즌에게 묻고 싶은 것을 지식인에 올린 적이 있다. 그 일환인 듯.
  •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오재석, 김승규와 함께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3~4위전 이란과 경기 후 기자회견에 나선 홍명보 감독은 "선수들 중 병역혜택을 우선으로 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연평도에서 전사한 장병에게 염치없는 짓을 하지 않았다. 남들이 피자, 햄버거 등을 섭취할 때 우리는 스스로 컨트롤했다"고 말하며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운 야구국가대표팀을 비하 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사실 야구선수들은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패스트푸드로 때운 반면 축구대표팀은 국가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아 매끼 한국음식을 비롯한 호화로운 식사를 했다.
  • 브라질의 축구선수 둥가가 그와 비슷한 면이 많다. 해당 문서 참조.
  • 게다가 차범근이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에 출연한 하석주와 감동의 재회를 했었는데 칼럼에서 차범근은 98 월드컵 이후 자신에게 연락을 안 한 선수는 하석주와 홍명보 뿐이라고 언급하면서 논란이 또 커졌다. 하석주야 각주에도 적혀 있듯이 죄책감이 너무 커서 연락을 못 했고 차범근도 이를 이해했지만, 홍명보에게는 그럴 이유도 없었고 게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여론에게 비호감으로 찍혔었다.
  • 1993년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었던 김호에게 락커룸에서 폭행을 당했었다고 한다.
  • 김판곤 국가대표 선임위원장이 벤투 감독을 선임하기 직전에 여론이 험악해지자 마음고생이 심해져서 댓글에 대한 경험이 많은 홍명보한테 전화를 걸었고, "'결과가 나오면 여론은 바뀐다'''며 김판곤을 위로해줬다.
  • 2003년부터 2018년까지 16년간 본인이 만든 장학재단인 홍명보장학재단을 통해 홍명보 자선축구대회를 개최했었다. 16년간 총 22억 8천만원이 모였고 주로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사용되었다. 2018년 마지막 자선 경기 하이라이트
  • 현역시절 1994년 미국월드컵, 유럽 올스타 vs 세계 올스타전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유수의 스페인팀과 대표적인 명문팀 FC 바르셀로나에서 영입제의를 받은적이 있다고 한다. 2002년 당시 기사 원문은 삭제된 상태고 퍼온 기사 내용만이 남아있는 상태다.
  • 잘 알려진 사실로 빠른 1969년생이라 황선홍과도 상당히 친하다.
  • 울산 감독 부임 후 주목받고 있는 사실인데 아주 높은 확률로 ~하자고 라는 말투를 사용한다.
  • 제주도를 좋아한다. 여행도 자주 다닐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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