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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민 장가현/심마담/분리공정/장가연/프로필 -총 정리

by 생생생존정보 2022.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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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민

출생
1973년 4월 5일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사망
2013년 1월 6일 (향년 39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신체
194cm, 110kg, A형
국적
대한민국
가족
아버지 조주형, 누나 조성미
자녀
아들 최환희
최준희
학력
용마초등학교 (전학)
둔촌초등학교 (졸업)
신일중학교 (졸업)
신일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졸업)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6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요미우리)
2005년 신고선수 (한화)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6년 ~ 2002년)
한화 이글스 (2005년 ~ 2007년)
지도자 경력
두산 베어스 2군 재활코치 (2011년)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2년)
수상
일본시리즈 우승(2000)
종교
천주교(세례명: 마리오)
서명
 

 

1. 소개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
포지션은 투수.
고교 시절 당시 뛰어난 야구 실력과 탈아시아급 피지컬과 준수한 외모로 인기를 얻었던 야구선수였으나 프로 진출 이후 부상과 자기관리 부족으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다.
2000년 12월에 인기배우 최진실과 결혼을 하였으나 4년만인 2004년 이혼했다.
이후 가정폭력을 저질렀고 언론플레이를 일삼아 결혼 파탄의 원인을 최진실에게 전가하려 했던 것이 들통나 사회적으로 추락했다.
2005년에 한화 이글스에 투수로 복귀했으나 이렇다할 성적으로 거두지는 못했고 2007년에 은퇴했다.
2008년 최진실의 자살 이후 두산 베어스의 코치로 활동하고 아이들과 어울리며 다시금 재기의 기지개를 피는 듯 했으나 2013년 1월 6일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

 

1.0.1. 고등학교 이전

 

초등학교 4학년때 가족이 강동구 둔촌동으로 이사하며 조성민도 둔촌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이 때부터 야구부 생활을 시작.
훗날 190대 중반까지 자라는 체격은 이미 이 때부터 운동부가 눈독을 들일 정도였고, 한창 때 운동선수로 활약한데다 한때 실업야구 최강을 자랑했던 한일은행 소속 은행 간부였던 아버지 조주형의 인맥 덕에 야구인들에게 일찌감치 눈에 띌 수 있었다.
게다가 누나 역시 사이클 선수로 활약하는 등 엘리트 운동선수 집안 출신.
다만 평소 학업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공부에도 힘을 쏟느라 신일고 진학 이전에는 큰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이후 고교 진학을 앞두고 출전한 전국대회에서 타격왕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야구선수의 길을 걷는다.
.

 

1.0.2. 신일고등학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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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고려대학교 시절

 

박찬호(한양대), 임선동(연세대) 등과 함께 '황금의 92학번' 중 하나였다.
2학년 시절인 1993년 9월 영남대와의 추계리그 경기에서 7회까지 노히트 노런을 이어가다가 안타를 맞아 깨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최남수 감독이 조성민의 노히트 노런이 깨지는 순간, 안타깝게도 충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48세를 일기로 타계하고 말았다.
결국 고려대는 10여일 후 열린 연세대와의 정기전을 감독 없이 치렀고, 끝내 승리하여 은사의 영전에 승리를 바칠 수 있었다.

 

1.1. 일본 프로야구 진출

 

학창시절의 국제대회 활약으로 슬슬 해외진출 분위기가 무르익게 된다.
고교 때 이미 국제대회 출전 기회를 가져 해외에 이름을 알린 것에 더해, 대학 재학중에도 미국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에 선발되어 박찬호와 함께 인상깊은 활약을 펼쳤다.
압도적인 강속구를 가진 박찬호에 비해서는 평가가 낮았지만 조성민 역시 메이저리그 일부 팀들의 관심을 얻는 데에는 성공했고, 이중에는 몇 년 후 봉중근을 영입하게 되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과거 최동원에게 입단계약을 제시하고 훗날 류현진을 통해 결국 한국 선수를 품에 안은 토론토 블루제이스도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교차검증하기 전에는 확신하기 힘든 일이지만 당시 거론된 계약금이 무려 백만 달러 수준으로 박찬호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때 링크가 났다는 토론토로 진출했으면 박찬호와 함께 사이좋게 메이저리그에서 롱런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웬일인지 그는 이 선택을 하지 않고 그냥 대학을 졸업해 버렸고 미국에도 가지 않았다.
나중에 밝힌 바로는 자신보다 평이 낮았던 선수가 먼저 미국에서 활약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 만일을 위해 대학 졸업장을 확보하려는 의지도 있었고, 1호를 빼앗긴 미국무대보다는 일본 요미우리같은 명문팀에서 성공하면 자존심이 회복되는 것 아니냐는 계산도 있었다.
그래서 요미우리로 진출했고, 요미우리에서는 계약금 1억 5천만엔이라는 거금이자 박찬호의 계약금(120만 달러)과 엇비슷한 액수를 맞춰주며 자존심은 세워주었지만 계약 기간이 무려 8년이었다.
당시의 조성민이 미리 알기는 힘든 일이었겠지만 이 요미우리행도, 그리고 8년이나 되는 긴 계약기간도 결국 썩 좋지 않은 선택이 되었다.
그래도 다행히도 고교 졸업당시 미지명된 것이 신의 한 수가 되어 별다른 분쟁 없이 일본 무대에 진출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이 때가 대학을 졸업한 1996년.
비슷한 시기 임선동은 과거 자신을 지명한 LG의 동의없이 다이에와 입단계약을 맺는 바람에 소위 '임선동 파동'을 일으키며 끝내 해외 진출에 실패했다.
.

 


1.1.1.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과 짧은 전성기

 

이런 우여곡절 끝에 조성민은 1995년말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었다.
상술했듯이 8년이라는 이례적으로 긴 계약이었는데, 이에 대한 이유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이 8년 짜리 계약은 2020년 기준 아직도 NPB 역대 최장 계약기간 2위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일본인 FA 장기계약자 중에선 7년을 넘어가는 선수가 한 명도 없다.
2019년 야나기타 유키나 2020년 야마다 테츠토같은 유명 선수들이 원 소속팀과 7년 계약을 맺자 새삼스럽게 조성민의 장기계약 사례가 다시 소환되었을 정도였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은 조성민.
옆의 등번호 33번은 당시 감독이던 나가시마 시게오.
등번호는 1997년까지는 51번을 사용했으며, 이후 퇴단할 때까지 21번을 유지했다.
유니폼 등록명으로는 'S.
M.
CHO'과 'CHO'를 사용하였다.
일반적인 일본진출 사례와는 달리 유망주 시절 건너가 거인팜에서 길러진 선수.
그러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교진(巨人, 자이언츠)에게 관리 따위는 장식이었다.
신일고 시절부터 혹사당해왔던 팔에 문제가 생기면서 거의 매일 재활치료를 받아야 했다.
1996년에는 그래서 2군에서 담금질을 하며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
1997년 7월 처음으로 1군에 등록, 7월 5일에 한신 타이거즈를 상대로 8회말 등판, 데뷔전을 가졌다.
이후 중간계투와 중무리를 오가면서 1구원승 11세이브, ERA 2.
89를 기록한다.
센트럴리그 소속이라 타석에도 들어서며 안타와 타점도 기록했다.
1998년에는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 완봉과 완투를 곁들여가며 전반기에만 7승을 올리는 등 물오른 기량을 과시하며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올스타 멤버로도 선발되었다.
이 때까지가 그의 커리어 정점.
이 해는 마침 선동열이 주니치에서 철벽 마무리로 완벽하게 자리잡고, 박찬호도 다저스에서 3점대 ERA와 15승을 찍는 전성기 시절이었기에 한국 스포츠 언론에서 해외파 3인방으로 매일 대서특필했다.
선동열 조성민 박찬호가 동시에 세이브와 승리를 올린 날도 있었는데, 이런 날은 야구팬들의 화제가 하루종일 고정될 정도였다.
야구선수로서 본인이 구상했던 위치와 가장 근접한 것도 이 때였을 것이다.
그러나.

 

1.1.2. 팔꿈치 부상과 퇴단

 

1998년 드디어 기량이 만개하는가 싶었지만, 선수로서 정점에 섰던 바로 그 순간 그의 인생 최대의 불운이자 커리어를 망쳐버린 팔꿈치 부상이 찾아온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부상 시점은 올스타전이지만, 사실 전반기 마지막 두 경기에서 대량 실점하며 이미 부진에 빠진 상태였고 그 원인이 바로 팔꿈치 부상이었다.
이런 경우 감독이 알아서 대체선수를 추천하는 등의 방식으로 출전을 불발시켰어야 했는데 웬일인지 그냥 놔둬 버렸다.
대신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올스타전 센트럴리그 팀 투수코치인 곤도 히로시(당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에게 알리라고 조성민에게 조언은 했다는데, 뚜렷한 이상징후가 있었다면 올스타전에 아예 내보내지 않는 것이 당연히 맞는 선택이다.
당시 팬투표로 뽑힌 것도 아니고 감독 추천 선수였으니 더욱 아쉬운 일이다.
조성민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래서 당시 팔도 못 들 정도로 팔꿈치가 아프니 등판시키지 말아달라고 직접 일본어로 곤도 히로시에게 호소했으나 그는 "너만 아픈 줄 아냐?"면서 무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9회부터 연장전까지 1이닝을 넘게 투구하면서 몸에 제대로 탈이 나고 만다.
곤도 히로시에게 조성민이 한 호소가 사실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는 곤도 자신이 혹사로 일찍 선수생활을 마감한 당사자이기에 투수 혹사를 가급적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
하지만 당시 조성민이 부상을 당하고 요미우리가 즉시 항의한 점, 요미우리와 요코하마가 1위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중이던 점, 당시는 9회였고 엔트리에 전문 마무리 사사키 가즈히로가 멀쩡히 남아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사사키가 당시 요코하마 소속이었다는 점 등을 보면 사실일 확률이 높다.
실제로 해당 시즌 센트럴리그는 요코하마가 우승했다! 요미우리는 조성민 이탈 이후 DTD를 펼치며 3위를 기록했다.
이후 곤도는 우승에 눈이 멀어 상대팀 에이스를 망가뜨렸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그래도 당시에도 이미 토미 존 수술은 대중화되어 있었기에 제 때 수술받고 재활만 착실히 잘 했으면 제2의 전성기가 찾아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성민은 이렇게 하지 않았고 잘못된 선택을 잇따라 하게 된다.
일단 올스타전 사건 이후 바로 수술대에 오르지 않고 이듬해 3월까지 기다렸다가 뒤늦게 수술을 결정했다.
이제 막 처음으로 잘 나가보려는 참에 부상을 당했으니 재활을 통해 일단 시즌 마무리는 해보고 싶었던 것.
그러나 생각보다 팔꿈치 상태가 심각하여 수술 없는 재활은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경기에도 나서지 못했다.
그래도 더 미루지 않고 1999년 초에 수술을 받은 것까진 좋았는데, 이번엔 복귀를 너무 서두르다가 탈이 났고 재활도 그만큼 늦어졌다.
그래도 팔팔한 20대 시절이었으니 이듬해에 복귀하는 데에는 성공한다.
2000년에는 최진실과의 열애설이 터지며 컨디션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발목부상, 어깨 부상까지 추가로 당하며 14이닝 투구에 그친다.
코칭스태프의 신임을 잃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 즈음.
컨디션이 별로이니 주어진 보직도 왔다갔다했는데, 부진한 선수를 무작정 고정 보직에 투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2001년 시즌에는 절치부심하고 강도높은 훈련을 소화하면서 재기를 노렸지만 팔꿈치 통증이 재발했고, 이 번에는 시즌 후까지 기다리지 않고 바로 수술을 받긴 했다.
또다시 무리하게 빠른 재활을 시도하며 완전히 구위를 잃게 된다.
이후 2002년 시즌 초 극적으로 1군에 콜업돼 선발승도 거두는 등 몇 경기에 더 나서긴 했지만 이미 속구 최고 구속이 140대 초반에 머무는 등 본인의 경쟁력을 거의 다 상실한 상태였다.
결국 2002년 10월 구단과의 합의하에 퇴단을 결정하였다.
그렇게 자유의 몸으로 귀국하며 인생 3라운드를 노리게 된다.

 


1.2. 한국 무대 복귀

 

조성민은 한국 복귀 후에도 야구선수로 계속 활약하기를 원했다.
본인의 회고로는 이 당시 미국 무대에 가고 싶었다고 하며, 퇴단 이후 미국에서 재활에 전념하고 싶다는 인터뷰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미 틀어지기 시작한 사생활 문제탓인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을 결정하게 된다.
일단 규정상으론 조성민은 1999년 이전에 해외로 건너간 케이스라서 '한국 리그를 거치지 않고 해외 리그로 진출한 선수가 국내로 돌아올 경우 2년간의 유예기간이 적용되어 국내에서 뛸 수 없다'는 규정이 적용되지 않은데다가, 고교 및 대학시절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은 적도 없어서 표면적으로는 리턴 후 곧바로 한국에서 뛰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팀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고교졸업 당시 연고팀이던 LG와 두산의 1차 지명도 가능한 상황.
그래서 본인은 내심 상위권 지명을 통해 마지막 자존심을 세우며 화려하게 국내무대로 복귀하려던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그는 이미 20대 초반의 팔팔하던 신인 선수가 아닌, 팔꿈치 수술만 두 번을 받고 경쟁력을 상실해버린 30대 초반의 전직 야구선수였다는 것이다.
이 상태의 조성민을 영입하기 위해 상위 지명권을 사용할 팀은 없었다.
또한 퇴단 합의시기가 늦어 복귀 이듬해 바로 뛸 수 없었다는 부분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2003년 드래프트는 2002년 6-7월에 완료되었다.
) 게다가 이 시점은 이미 후술할 사생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 뒤의 시점이다.
다른 조건이 모두 좋았어도 공백기와 나이 때문에 상위 지명이 부담스러울 판에 기량 자체가 물음표인데다 사생활 문제까지 있는 선수를 지명권까지 써가며 영입할 팀은 없었다.
아무튼 2003년 4월에 조성민은 2004년 신인지명 참가 신청서를 제출한다.
하지만 1차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LG와 두산은 그를 외면하였고, 2차 지명에서도 참가했으나 1라운드에서 자신이 호명되지 않자 자리를 뜨고 만다.
자존심을 버리고 하위 지명이나 신고선수로 입단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아예 자리를 뜨는 방식으로 이를 거절해버린 것이다.
1년 뒤인 2004년, 즉 2005년 신인드래프트에서도 모든 구단에게서 외면받는 비슷한 모습을 반복했는데, 이때는 이미 후술할 명예훼손 시도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뒤였는데도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고 지명 받은 선수 중 몇 명이나 뛰는지 지켜보겠다는 쓸데없는 발언을 해서 더욱 까였다.
고려대 선배인 박노준처럼 스타 의식에 지나치게 젖어있다는 비판이 자연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복귀를 서둘러 공백기를 조금이나마 줄이고 백의종군의 자세로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면 KBO 리턴 후에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순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리그에서 제대로 된 활약을 해볼 마지막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렸다.
이후에는 개인 사업에 전념했다.
사실 선수 복귀가 불발됐다고 부랴부랴 급조한 사업은 아니고, 요미우리 소속이던 2002년에 부부의 성을 딴 "C&C 컴퍼니"를 세우며 이미 사업가 변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첫 프로젝트로 일본에서 선수생활하던 시절 좋아했던 슈크림 브랜드 '비어드 파파'를 국내에 보급하려 했고 실제로 한국 내 프랜차이즈 영업권을 따낸 뒤 2002년 8월 목동에 1호점을 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신통치 않았고 법적 분쟁까지 겹치며 대차게 말아먹었다.
일단 사전 시장조사가 미비해 무턱대고 사업에 뛰어든게 문제였고, 하술될 막장이미지까지 겹치면서 국내야구팬들에게 '슈크림 조'라는 별명(혹은 혐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참고로 해당 브랜드의 운영권은 2004년에 코오롱그룹 계열사 스위트밀이 넘겨받아 이후에도 곳곳에서 매장을 볼 수 있었다.
이후 2005년에는 당시 국내 프로야구 중계를 재개한 MBC ESPN에 잠시 해설자로 있었는데, 고려대학교 선배인 허구연의 권유로 영입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그의 현역 복귀도 완전히 물건너가나 싶었지만, 당시 한화 경기를 중계하러 갔다가 만난 김인식(당시 한화 감독)의 권유로 한화 이글스 입단이라는 마지막 기회를 잡는다.

 

1.2.1. 한화 이글스 시절

 

한화 이글스에서 3년간 불펜투수로 활동하고 은퇴하였다.
전성기가 지나고 몸 상태도 말이 아니어서 별 기대가 없었지만, 그래도 이 시기에는 사생활 문제를 크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운동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미약하나마 명예회복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다.
2005년 5월 5일, 한화 이글스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
당시 연봉은 5천만원.
7월 1일 1군 합류를 목표로 훈련하였고, 마침내 2005년 8월 15일 현대 유니콘스전에서 KBO리그 데뷔 무대를 가져 1.
1이닝 무실점으로 첫 승(구원승)까지 챙겼지만 많은 경기에 나서지는 못하며 2승 2패 4홀드 ERA 6.
52로 실망스런 성적을 거두었다.
그래도 현장의 평가가 괜찮았는지 2006년에는 연봉이 1억 110만원까지 올라갔지만, 이 시즌에는 어깨수술까지 받으며 고작 7경기에밖에 나서지 못했다.
그래서 2007년 연봉은 다시 7,600만원으로 삭감했다.
현역 마지막인 2007년 시즌에는 송진우의 부상으로 생긴 기회를 잡으며 선발로도 8번 나섰고, 시즌 ERA로 4점대 초반을 찍는 등 쏠쏠한 활약을 해주었다.
겉보기엔 분명 괜찮은 성적이었고 나이도 만 34세로 좀 더 활약할 여지가 없지 않아 보였으나, 사실 7월에 2군으로 내려간 뒤 어깨 통증 재발 등으로 재활군에만 머물었기에 한화에서도 더이상 미련을 두기 힘들었다.
결국 10월 한화로부터 보류 선수 제외(방출) 통보를 받고 그대로 은퇴했다.

 


1.3.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6
요미우리
1군 기록 없음
1997
22
28
1
2
11
-
0.333
2.89
16
1
13
1
30
10
9
1.036
1998
15
104⅔
7
6
0
-
0.538
2.75
96
4
34
4
83
36
32
1.242
1999
1군 기록 없음
2000
10
14
1
2
0
-
0.333
3.86
20
2
5
0
9
9
6
1.786
2001
1군 기록 없음
2002
6
11⅔
2
0
0
-
1.000
2.31
12
1
2
0
5
3
3
1.200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5
한화 이글스
16
19⅓
2
2
0
4
0.500
6.52
30
1
9
6
8
15
14
2.017
2006
7
6⅔
0
0
0
0
0.000
6.75
12
1
6
0
4
6
5
2.700
2007
12
43
1
2
0
0
0.333
4.19
41
3
19
5
18
23
20
1.395
NPB 통산(4시즌)
53
158⅓
11
10
11
-
0.524
2.84
144
8
54
5
127
58
50
1.251
KBO 리그 통산(3시즌)
35
69
3
4
0
4
0.429
5.09
83
5
34
11
30
44
39
1.696
개인 통산(7시즌)
88
227⅓
14
14
11
4
0.500
3.52
227
13
88
16
157
102
89
1.386
    • 일본프로야구에서 홀드는 1996년부터 퍼시픽 리그에서만 도입되었고 2005년부터 센트럴 리그에도 도입되었다. 요미우리는 센트럴 리그에 포함되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홀드 기록을 산출하지 않았다.

 

2. 해설자 경력

 

XTM에서 마해영과 함께 김태균이 출전하는 지바 롯데 마린스의 경기를 해설하기도 했다.
무난한 해설톤에 분석적인 해설을 했다는 평가.
특히 베이징 올림픽 야구에서 일본전의 경우 케이블에서 녹화 해설을 담당하였는데 투수와 포수의 움직임, 그리고 타자의 스탠스 등을 토대로 경기 흐름을 예측하는 해설을 했다.
.

 


3. 지도자 경력

 

코치 시절 조성민.
2011년 1월 27일자로 두산 베어스의 2군 재활 코치가 되었다.
해당 기사2012시즌 이후 박동희의 기사에 따르면, 코치로서 능력은 있었지만 지각과 결근이 잦았다고.
두산 측에서는 해외 연수 등을 권유했지만 그가 거부하고 스스로 떠났다고 한다.
이혼 후 과음으로 여러 번 결근과 지각을 했고, 구단 측에서 지적해서 본인도 그다지 재계약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

 

3.1. 첫 번째 결혼

 

고등학생 시절부터 배우 최진실의 팬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고등학교 동창 친구의 증언에 의하면 최진실의 사진이 인쇄된 책받침과 여러 사진들을 갖고 다니며 나중에 꼭 최진실과 결혼할 거라고 밝혔다고 한다.
하지만 이 당시 그 결혼이 훗날의 비극을 초래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1998년 12월에 방송을 통하여 서로를 처음 만난 후, 조성민이 구애하여 둘의 관계는 연인 사이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그와 최진실의 연애는 순탄치 않았는데, 나이 차이와 서로의 직업적 특성 등을 들어 조성민의 아버지와 최진실의 어머니(정옥숙) 모두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혼 전 기사 이혼 직전 기사 이때 조성민은 자살 기도까지 시도하였고, 결국 양가의 허락을 받아내어, 2000년 12월에 결혼식을 올려 최진실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게 된다.
결과론적이지만 이것이 조성민과 최진실, 두 사람의 가족 모두에게는 본격적인 비극의 시작이었음을 감안하면 양가가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됐다.
2001년 8월 1일 첫째 환희를 낳았다.
후에 장모였던 정옥숙이 밝히기를 이 시기에는 두 사람의 사이가 원만해서 조성민은 육아에 엄청난 공을 쏟았다고 하며, 3살 무렵까지 아버지, 어머니 사랑을 듬뿍 다 받았던 아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12월 18일 조성민은 자신의 사무실에 기자들을 불러서 기자회견을 자청한 뒤 최진실을 유책배우자라고 비난하였고, 이 과정에서 자신이 출산을 앞둔 최진실을 폭행했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최진실이 이혼을 강하게 반대하여 결국 소송은 못 걸었고, 대신 별거를 택했다.
이에 조성민은 2004년 9월까지 최진실에 대해 자주 명예훼손을 일삼았다.
2003년 3월에는 저 유책배우자 발언 때문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 시기의 행동은 씻을 수 없는 과오이며, 최진실의 가족들과 본인의 자식들에게도 큰 불행을 떠안겨 주게 된다.
결국 2004년 8월 조성민은 자택에서 최진실을 폭행하였고, 최진실은 더 이상 혼인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9월 합의이혼했고, 조성민이 슈크림빵 사업을 하며 최진실 가족을 상대로 빌렸던 돈을 갚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친권은 모두 최진실에게 넘겨주었다.
2002년부터 2004년 사이 최진실을 향해 명예훼손을 일삼은 건 사후인 아직까지도 대중들에게 조성민이 용서받지 못한 큰 과오 중 하나.
기자회견의 내용이 전부 최진실을 비난하거나 불륜에 대한 자기합리화, 혹은 최진실의 혼전 사생활등을 논하는 명예훼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성민이 최준희를 임신하고 있었던 시기부터 최진실을 여러 차례 폭행한 사실 또한 대중들의 비판을 받았다.
말년에 자신의 잘못을 어느 정도 시인하고 아버지로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어느 정도 평판이 나아졌다.
2008년에 전처 최진실이 사망한 이후에 아이들의 친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등 논란을 야기했다.
조성민이 친권을 갖게 될 경우 아이들이 물려받은 최진실의 재산을 조성민이 관리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여론은 급속히 악화되었고 네티즌들이 다음 아고라에서 반대 투표를 하기도 했다.
정옥숙 또한 그가 자녀들의 생일에 조차 한 번도 오지 않았다면서 반발하였다.
이에 조성민은 돈 문제에 관해서 최진실의 개인재산을 신탁재산으로 바꾸어 아이들을 위해 관리하려는 생각이었다고 해명했다.

 

3.2. 두 번째 결혼

 

그리고 최진실과 이혼한 지 3년뒤인 2007년 말에 재혼 사실이 알려졌다.
2년 전인 2005년에 이미 재혼했다는 것이 뒤늦게 알려진 것인데, 상대가 이혼 과정 당시 연인관계를 부인했던 '심마담'으로 알려져 '아니라고 우기더니만 사실이었군'이란 눈초리를 받았다.
2008년 10월호 여성잡지에서 자신의 아내는 사업 수완이 좋은 사람이고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지인도 많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결국 이 여자와도 헤어지게 된다.
그가 죽었을 때 사망 장소가 여자친구 집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그럼 두번째 아내는 어떻게 된 건지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누나 조성미가 이혼한 상태였다고 밝혔다.

 


4. 말년

 

2008년 10월 전 아내 최진실이 사망하자 시신이 발견되었던 아파트에 찾아와서 시신확인을 했다.
그 후 삼성서울병원에서 3일 내내 빈소를 지켰고, 발인 후 안치 과정까지 동행했다.
이 후에는 두산 베어스 코치 등을 역임하며 자녀들과 자주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녀들은 여전히 아빠에게 어색한 감정을 가지기는 했지만, 야구장에도 같이 오고 최진실의 추모식에도 참석하는 등 아빠로서의 역할을 하려는 모습을 보여줬다.
사족으로, 사망하기 3개월 전에는 아이들의 운동회에 나가서 아이들과 한 때를 보내며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겠다" 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이 시기 대중들의 반응은 "아이들의 아빠로서 도리를 다하고 아이들을 마음껏 사랑해줘라.
그것이 당신이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다" 였으며 대중들도 조성민에게 어느 정도 악의적인 감정을 풀려는 무드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5. 사망

 

2013년 1월 6일에 그는 전 애인의 집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사건 당시 그가 남긴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그의 죽음으로부터 1주일이 지난 1월 13일에 유서가 발견되어 그의 사망 원인은 자살로 확정되었다.
전날 그는 여자친구의 집을 방문했는데, 이 집에 머물던 중 그는 여자친구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이별 통보를 받은 뒤, 전 여자친구가 잠시 외출한 사이에 같은 집에서 자살한 것이다.
죽음에 앞서 그는 그의 어머니에게 "저도 한국에서 살 길이 없네요.
어머니한테 죄송하지만 아들 없는 걸로 치세요"라는 내용의 자살을 암시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는 유서를 통해서 유산은 자신의 누나 조성미에게 남겼다.
조성민까지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서 조성민의 자녀들은 어머니 최진실, 외삼촌 최진영, 아버지 조성민과 모두 자살로 사별하게 되었다.
우연히도, 셋 다 향년 39세이다.
출관예식은 2013년 1월 8일,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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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타

 

  • 한국에 복귀한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해 종종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야쿠르트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임창용의 이적설이 터져나왔을 때 임창용에게 요미우리로는 이적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 조성민 사후 조성민의 양친과 최진실의 모친인 정옥숙 씨 간에 재산 분쟁이 일어났다. 조성민이 소유하고 있었던 22억 시가의 빌딩에 부모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조성민이 사망하면서 법적 상속인인 환희·준희 남매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명의 이전 이후 후견인이 된 외할머니의 소송으로 강제 퇴거 위기에 직면하면서 문제가 불거지면서 법원까지 가게 되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조씨는 법적 권리자인 정옥숙 씨에게 부동산을 돌려주고 퇴거하라'고 결정했다. 다만 조씨 부부는 건물이 팔릴 때까지 거주하고, 부동산 매매(감정가 22억) 직후엔 그동안의 점유권을 인정해 이중 2억 5천만원을 보상해주라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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