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사범대학부속여자고등학교(졸업) 중앙대학교(연극학 / 학사) 중앙대학교 대학원 (예술학 / 석사)
데뷔
1974년 영화 '그대의 찬 손'
1. 소개
대한민국의 배우. 정윤희, 장미희와 더불어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명. .
2. 생애
1956년 3월 9일(음력 1월 27일) 생. 경상남도 사천군에서 이상갑과 정정순의 4남매 중 둘째로 출생,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데뷔 당시 그의 아버지는 육군 대령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3년 TBC탤런트 14기로 입사하였지만 정식 데뷔는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이후에 하였다. 당시 대학생 대상 잡지에 표지 모델로 나선 사진이 눈에 띄어 연방영화사와 주간한국이 공동으로 모집한 신인배우 모집에서 2,300:1의 경쟁률을 뚫고 1974년 영화 ′그대의 찬 손'으로 데뷔하였다. 인기 작가 강신재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었는데, 유지인이라는 예명도 주인공 '지인'의 이름에서 비롯됐고 흥행에도 비교적 성공한다. 1975년 TBC 드라마 님이 성공하고 <쥬단학화장품>(현<한국화장품>)의 전속 모델이 되면서 스타덤에 오른다. 이후 1977년까지 매년 1~3편의 영화에 지속적으로 출연하였고 77년 TBC 드라마 <서울야곡>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같은 해 TBC 드라마 <청실홍실>의 주연인 장미희·정윤희와 함께 신트로이카를 구축, 브라운관과 영화계를 이끄는 대스타로 성장한다.
1978년 영화 <마지막 겨울>도 흥행에 성공하면서 흥행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1979년 흥행 1위를 기록한 <내가 버린 남자>를 비롯해 <26 x 365 = 0>, <청춘의 덫>, <불행한 여자의 행복>, <가시를 삼킨 장미>, <심봤다> 등의 영화들을 히트시켰다. 이 중 <심봤다>로 트로이카 여배우 중 최초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79년을 완전히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정윤희가 나는 77번 아가씨로 대표되는 백치미를, 장미희가 겨울여자로 대표되는 청순미를 앞세웠다면, 유지인은 대학생이라는 신분에서 풍겨지는 도시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1980년에 제작된 이두용 감독의 <피막>으로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3대 국제 영화제 중 베니스국제영화제 본선에 진출하며 한국영화 세계화의 초석이 된다. 한동안 닮고 싶은 여성상 1위와 연예인 소득 1위 자리를 지켰다. 당시 유지인의 인기를 알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북한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이 1982년 한국으로 망명한 직후 본 광고판에서 유지인을 알아본 것.
지금과 다르게 80년대 초반에는 북한사람이 한국의 연예인을 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이는 이한영이 평양에 있는 김정일의 관저에서 유지인의 출연작을 접했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또 다른 여배우들과 달리 스캔들이 단 한 번도 없었을 정도로 사생활이 깨끗한 배우였다. 그런데 결국엔(. ) 또한 지성미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답게 윤정희에 이어 여배우 중 두 번째로 석사 학위를 취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TBC 전속 탤런트인 장미희, 정윤희와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를 이루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1986년 결혼과 함께 연예계에서 은퇴, 16년 만인 2002년 이혼과 동시에 전격 복귀하여 지금도 활동 중이다. 유지인이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는 후시녹음이 보편적이어서 매력적인 목소리를 위해 성우를 기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유지인은 자신의 목소리를 많이 활용하는 편이었다. 80년대 들어서까지 성우를 대용하기도 한 다른 여배우와 달리, 유지인은 79년 영화인 가시를 삼킨 장미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그대로 썼다.
유지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워낙 털털한 성격이라 정윤희와 장미희가 트로이카로 한참 치열할 때 본인은 발만 담그고 거기서 좀 물러서 있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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